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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주민등록번호를 버리는 고통

이유지 기자
[디지털데일리 이유지기자] 이미 엄청난 피해를 겪긴 했지만, 인터넷 이용자들을 괴롭히거나 불안에 떨게 했던 개인정보 유출 문제가 앞으로는 상당히 해소될 수 있는 토대가 빠르게 마련되고 있다.

크고 작은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최근 몇년 간 연이어 터지면서 개인정보보호 인식과 법제도가 상당히 개선됐다. 주민등록번호를 비롯해 다양한 개인정보를 수집·이용 중인 기업들은 이용자 개인정보보호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몇몇 선도기업들은 지금까지 수집해온 주민번호도 폐기하겠다고 선언하고 이행에 나섰다. 개인정보보호법 등 제정되거나 강화된 관련 법제도는 이같은 개인정보보호 강화 조치를 더욱 강제하고 있다.

지난해 시행된 개인정보보호법 외에도 개인정보보호 규정이 꾸준히 강화돼온 정보통신망 이용 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정보통신망법)은 최근 한차례 더 개정되면서 아예 인터넷상에서 주민등록번호 수집을 원칙적으로 금지시켰다.

이 법에 따르면 지난 2월 공포된 개정 정보통신망법이 시행되는 오는 8월 18일부터는 하루 방문자 수 100만명 이상의 웹사이트는 주민번호 수집이 전면 제한된다. 이날부터 1500개가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인터넷서비스 사업자는 이같은 의무가 우선 적용된다. 2년 뒤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예외로 인정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영리목적의 웹사이트에서 주민번호 수집·이용뿐 아니라 이전에 수집한 주민번호도 폐기해야 한다.

그간 우리나라 국민 개개인을 식별하고 본인임을 확인하는 최고의 수단으로 쓰이면서 개인정보 유출 사고 피해를 키워왔던 주민등록번호가 최소한 인터넷상에서는 상당히 사라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를 현실화하는 것 역시 쉽지 않다. 50년 동안 써왔던 오프라인에서의 관행 그대로 인터넷에서도 지난 10여년 간 주민등록번호를 광범위하게 활용해 왔기에, 단번에 없애기에는 많은 난관이 존재한다.

그 이유로 인터넷 포털·게임·쇼핑몰 등 정보통신서비스제공자들은 확실한 주민번호 대체수단 부재, 타 법과의 충돌, 상당한 시간 및 비용 부담과 같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문제를 토로하고 있다. 사실 저항이 만만치 않다.

가장 쟁점이 되는 주민번호 대체수단으로 아이핀(i-PIN)과 공인인증서, 휴대폰, 신용카드 등을 활용한 이행방안이 제시된 상태이지만, 사업자들은 계속해서 가장 효과적이고 안전한 ‘확실한’ 대체수단을 요구하고 있다. 아니면 ‘과도기적’ 대체수단을 허용하고 유예기간도 제공해 부담을 최소화 해달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고객, 즉 인터넷 이용자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얘기한다.

‘법 개정 취지에 공감한다’고 하지만, 엄밀하게 볼 때 당장 이행하지 못하겠다는 의미다.
OK캐시백을 운영하는 SK마케팅앤컴퍼니는 방통위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이로 인한 회사 존폐 위기까지 거론할 정도다.

상황이 이렇게 심각해진 것에는 주민번호 수집 제한 정책이 반영된 정보통신망법 개정 과정에서 직접 규제 당사자가 되는 사업자들이 대책을 마련하고 준비할 시간을 가능한 충분히 제공하는 배려를 하지 못한 탓이 크다.

큰 사업자 혼선이 예상됐을텐데 청소년보호법·게임법·전자상거래소비자보호법 등 타법률과의 관계나 구체적인 이행방안도 미처 미리 준비하지 못했다.

사업자 반발이나 논란이 거세지면서 방통위는 사업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설명회를 가졌다. 청소년보호법·게임법·전자상거래소비자보호법 등 타법률과 관계 때문에 혼선을 빚었던 사항에 대한 구체적인 이행방안도 비교적 신속하게 제시했다. 또 한국인터넷진흥원(KISA)를 통한 주민번호전환지원센터를 구축해 5월부터는 사업자 지원을 시작하고 어려움을 줄여나갈 수 있는 방안을 계속해서 함께 모색하겠다는 방침도 밝혔다.

앞으로 법 이행여부 점검이나 행정처분 적용에 유예기간을 제공하는 요구도 검토하겠다고 시사했다. 다행스런 점이다. 앞으로 법 적용 예외를 규정한 고시도 신속하게 하는 것이 사업자를 도와주는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사실 법이 이미 개정돼 시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법을 개정하지 않는 한 돌이킬 수 없다. 사업자들도 이같은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불만을 토로하고는 있지만 ‘배 째라’ 식으로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각도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결국 가장 중요하고도 분명한 것은 인터넷을 사용하는 대부분의 국민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상황에서 핵심이 되는 주민번호 수집·이용 관행이 획기적으로 변화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점이다.

쉽게 버릴 수도, 버리기엔 고통도 따르지만 지금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번 고비를 넘긴다면 오프라인에서도 불필요한 주민번호 수집·이용이 최소화되거나 사라지고, 또 언젠가는 주민번호제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작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모든 발전과 변화에는 진통이 있기 마련이지.” 지난 주말 한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다.

이 말이 인터넷상 주민번호 수집을 원칙적으로 금지한 법안 시행을 앞두고 인터넷사업자들이 겪고 있는 최근 상황을 표현해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와 사업자, 전문가들이 함께 노력해 이용자들의 지지와 관심 속에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부작용을 최소화할 지혜로운 방안을 찾아나갈 수 있길 기대한다.

<이유지 기자> yj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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