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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레노버의 비상, 삼성과 LG의 TV

한주엽 기자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중국 레노버가 IBM의 PC 사업 부문을 인수했던 2005년. 누구도 그들이 ‘세계 1위’의 지위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진국 소비자들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중국=싸구려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레노버 PC를 구입해서 써본 소비자들의 반응은 의외였다. 1위 업체 제품과 비교해도 성능 차이가 크지 않고 오히려 가격이 저렴해 좋다는 평가가 많았다. 중국 시장을 등에 업은 레노버는 야금야금 점유율을 확대해나가더니 최근 들어서는 판매량 부문에서 1위 업체인 HP마저 넘어섰다.

레노버가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배경은 PC 산업이 완전한 성숙 단계에 접어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CPU, 메모리, 메인보드, 액정표시장치(LCD), 배터리 등 PC에 탑재되는 부품은 업계 전반적으로 공용화가 이뤄져 있다. 유일하게 설계 및 생산 능력을 가진 삼성전자를 외하면, 대부분 PC 업체들이 중국에 공장을 둔 대만 ODM 업체에 생산을 위탁한다. 시장 진입 장벽이 없는 이런 레드오션 산업에선 수량 경쟁력이 있는 업체가 유리하다.

대만의 폭스콘, 컴팔, 콴타, 페가트론 같은 ODM 업체는 인텔이 신형 CPU를 내놓으면 그에 맞춘 다양한 형태의 노트북 시제품을 만들고 PC 업체를 찾아가 영업을 한다. 매 분기 1000만대 이상 PC를 팔아대는 레노버 등은 ODM 업체에 껍데기 소재나 포트 배치를 바꿔달라는 등 이런저런 요구를 할 수 있다. 인텔코리아의 관계자는 “LG전자처럼 연간 PC 판매량이 미미한 업체는 이런 요청을 해도 매번 거절을 당하기 일쑤”라고 했다. 레노버는 규모가 크기 때문에 대당 생산 가격도 저렴하게 맞출 수 있다. 거대 중국 시장을 등에 업은 레노버는 회사 덩치를 키워 이렇게 가격 및 제품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레노버는 ‘세계 1위 PC 업체’라는 수식어를 달고 중국=싸구려라는 이미지를 빠르게 지워나가고 있다.

문득 LCD TV 산업도 PC처럼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중국 TV 업체들은 현지 시장을 등에 업고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중국은 이미 북미를 제치고 최대 TV 수요국으로 떠오른 지 오래다. LCD TV를 만들어서 파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TCL, 스카이워스, 하이센스 같은 중국 TV 업체들은 현지 시장을 등에 업고 판매량을 큰 폭으로 늘리고 있다. TCL의 경우 3분기 343만6000대의 TV를 판매, 347만4000대를 판매한 3위 업체 소니를 턱밑까지 추격했다. 업계에선 4분기 TCL이 소니를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HP나 델이 그랬던 것처럼 삼성전자나 LG전자의 중국 TV 시장 점유율이 그리 높지 않다. 더욱이 중국 업체들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삼성이나 LG를 철저하게 따라하고 있다. 리둥성 TCL 회장은 “삼성을 학습 및 모방의 표본으로 삼아야 한다”며 “삼성이 지나간 길은 중국의 동종 기업들이 앞으로 5년 동안 반드시 직면하게 될 문제이자 표본이라고 해도 괜찮다”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실무자들은 중국 업체들을 무시해선 안된다. 올해 1월 소비자가전쇼(CES) 현장에서 나는 중국 전시관을 돌던 삼성전자의 직원들이 “짱개(짜장면) 냄새 나는 것 같다”며 웃고 지나가는 걸 봤다. 삼성전자와 LG전자의 TV 기술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업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소비자들이 그 가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예전에는 디자인으로 차별화를 했는데 베젤(테두리)이 없는 요즘 LCD TV는 상표를 가리면 누가 만들었는지 알아채기가 힘들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내년 풀HD보다 해상도가 4배 높은 울트라HD(UHD) TV를 새로운 트렌드로 내세울 것이라고 한다. 콘텐츠도 없는 UHD TV를 내세우는 건 순전히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나온 공급자 중심적인 사고가 아닐까.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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