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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C-P-N-D의 ‘N’은 ‘그 N’이 아니더라”

이유지 기자

[디지털데일리 이유지기자] 모토로라모빌리티, 야후, 블랙베리 등 해외 IT기업들이 한국 시장에서 줄줄이 철수하고 있다. 그러나 오히려 국내 네트워크 시장에는 해외 업체들이 꾸준히 진출하고 있다.


유·무선을 막론하고 국내 통신·네트워크 시장은 시장규모가 작은데다 아주 성숙돼 있고, 또 몇몇 업체가 장악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입장벽이 높은 편이다. 이 시장 최강자로 통하는 시스코를 비롯해 국내 진출한 지 오래된 글로벌 업체들도 매출이 감소하면서 많이 힘들어 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 시장에 진출하거나 한국 지사를 강화해 아시아 등 글로벌 시장 확장을 위한 핵심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네트워크 관련업체들이 최근 두드러지게 늘고 있다.

사이언, 아리스타네트웍스, 에어로하이브네트웍스, 자이젤, NEC 등이 최근 1~2년 동안 새롭게 한국지사를 구성해 사업을 시작했고, 새롭게 진출을 준비하는 곳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익스트림네트웍스와 파이어타이드의 지사는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지역까지 커버하고 있다. 국내에서 해외 사업까지 관장한다. 디링크는 아예 본사에서 직접 관할하는 체계로 바꾸고, 한국지역을 아시아와 전세계 사업 확장 교두보를 삼겠다며 지원을 강화하고 있다.

시스코 역시 2년 전 인천 송도에 투자 계획을 발표하면서 KT와 KCSS라는 합작사를 설립했다. 송도가 당초의 그림처럼 발전하지 못해 이 역시 아직 큰 성과가 없는 채로 난항을 겪고 있긴 하지만, 송도에 스마트시티 모델을 구축해 이를 해외로 확장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었다.

이렇게 네트워크 업체들이 새롭게 진출하고, 한국지사의 역할과 범위를 확대·강화하고, 합작사를 설립하는 이유는 일단 우리나라 ICT 환경이 앞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초고속
인터넷, 3G에 이어 4G LTE(롱텀에볼루션) 이동통신망까지 선도적으로 구축하면서 앞선 ICT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스마트폰 사용자 수도 엄청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개인이든, 기업·조직이든 최신 ICT 기술을 발빠르게 도입해 활용하는 ‘새 것에 민감한’ 소비자들의 성향이 우리나라를 매력적인 시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러다보니 한국에서 구축한 사례, 한국에서 경험한 프로젝트를 갖고 해외 사업의 방향성을 결정하고 적극 소개하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테스트베드 내지는 훌륭한 레퍼런스가 되기 때문이다.

또 스마트폰 등 모바일기기, 스마트TV 등의 가전제품이 세계 시장을 휩쓸고 있는 것도 한국을 ‘ICT 선도국’으로 이미지를 굳히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해외 업체들에서 “글로벌 사업을 추진하려면 예전에는 제일 먼저 미국에 진출해야 하고 유럽과 일본으로 뻗어 나갔다면, 이젠 중국과 더불어 한국 진출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일본의 대기업으로, 최근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킹(SDN) 사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는 NEC는 “미국, 일본 다음으로 한국 시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할 정도다.

국내 네트워크 시장에서 국산 장비 업체, 토종 산업이 강하지 않은 것 역시 진출을 결정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같다.

휴대폰이나 검색포털 시장에는 삼성전자와 NHN같은 최강자들이 시장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최근 철수를 결정한 업체들은 더이상 한국 시장에 남아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을 수 있다. 구글이 유독 한국 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네트워크 시장은 어떤가? 특정분야를 제외하고는 외산이 대부분 장악하고 있다. 여전히 네트워크 분야를 중요한 ‘산업’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통신강국’에 맞는 선도적인 인프라를 구축했지만 국산 기술을 안 써주고 정부와 공공기관마저 외면하니 우리는, 국내 산업은 해외 업체들이 기회로 삼는 이 좋은 국내 시장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시장이 개발한 기술을 국내에서 검증하고 구축해 좋은 사례를 만들고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또 해외로 뻗어 나갈 여력을 확보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하다는 것은 최근의 해외 업체들의 잇단 진출로 알 수 있다.

‘C(콘텐츠)-P(플랫폼)-N(네트워크)-D(디바이스)’로 대변되는 ICT 생태계 강화 논의가 꽤 오랜 기간 활발하게 벌어져 왔고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더욱 활성화됐다. 하지만 산업계에서는 “‘이 네트워크(N)’는 우리가 생각했던 ‘그 네트워크(N)’가 아니더라”며 씁쓸한 소리가 나온다.

서비스를 위한 최고의 통신·네트워크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만 해당되지 네트워크 기술과 솔루션은 ICT 생태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러다보니 관련업계에서는 정부 조직개편을 앞두고 과학기술과 더불어 ICT 기능을 모아 정책을 관장할 미래창조과학부에서 네트워크 산업이 찬밥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많이 나오고 있다.

통신 강국, ICT 선도국이라는 이미지에 걸맞는 네트워크 기술을 도입(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네트워크 기술을 만들어내고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정부부터 확고하게 인식해야 다.

그래야 높은 수준의 C-P-N-D로 박근혜 정부가 그리는 ICT를 통한 성장과 일자리 창출이 가능해질 것이고, 네트워크 분야에서도 우리나라 미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제 역할을 담당해낼 수 있다.

더욱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클라우드 컴퓨팅이 확산되고, 사물인터넷(IoT) 시대가 도래 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이다. ICT 시장과 업계가 재편되고 있다. 당연히 그 안에 속한 네트워크 시장도 큰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요즘 떠오른 ‘소프트웨어정의네트워킹(SDN)’도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큰 물줄기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 시기를 놓치면 안될 것 같다. 시장 재편이 시작되면서 글로벌 업체들과 같은 출발선에 서있는 미래 유망 기술 분야를 선택해 집중 육성하는 과감한 전략이 필요하다. 불공정하고 문제가 많은 시장 및 사업 여건을 개선하는 일은 기본이다.

‘2015년 네트워크 강국 도약’과 같은 거창한 목표를 잡을 필요도 없다. 국내든, 해외든 시장 점유율을 지금보다 소폭 넓히는 수준부터 시작하면 된다. 만일 글로벌 업체들이 주목하고 있는 성장 시장이자 우리가 속해 있는 아시아지역의 여러 국가로 반경을 넓힐 수 있다면, 그 다음의 성장은 업체들 스스로가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유지 기자> yj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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