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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커머디티화의 딜레마

한주엽 기자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독일 반도체 업체인 인피니언은 작년 3월 ARM 코어텍스-M4 기반의 32비트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XMC4000을 발표했다. 인피니언이 ARM의 MCU 코어를 라이선스하고, 관련 제품을 시장에 출시하는 것은 당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인피니언은 독자 MCU 코어인 트라이코어(Tricore)를 보유하고 있는 업체다. 업계에선 경기 불황 여파로 ‘범용’ MCU 코어에 연구개발(R&D) 자금을 투입할 여력이 떨어지자 ARM의 설계자산(IP)을 가져와서 쓰는 것이라는 해석을 내놨다. ARM 코어를 원하기 고객이 많기 때문에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 차원이라는 분석도 있다.

MCU 업계에서 ARM 코어의 ‘붐’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시기는 2010년 전후인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일본에선 르네사스 테크놀로지(히타치+미쓰비시 합작사)가 NEC의 반도체 부문을 흡수 합병해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로 재출범했다. 3사의 자산을 합친 르네사스는 MCU 시장에서 30%의 점유율로 압도적 1위 사업자 자리를 굳혔다.

NEC와 2위 경쟁을 펼쳤던 미국 프리스케일은 르네사스 일렉트로닉스가 출범한 그해 ARM MCU 코어 도입을 전격 발표했다. 프리스케일의 키네티스(Kinetis) 시리즈가 바로 ARM 코어 기반 MCU다. 모토로라에서 분사한 프리스케일은 68k 콜드파이어(ColdFire)와 콜드파이어플러스(ColdFire+), 파워 아키텍처 기반의 코어아이큐(QorIQ)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업체다. 독자 코어를 가진 프리스케일이 떨떠름하게 남의 기술(ARM 코어)를 병행해서 사용하기로 한 데에는 점유율 확대 목표라는 배경이 있었을 것이라고 업계의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이탈리아 SGS 마이크로일렉트로니카와 프랑스 톰슨세미컨덕터의 합작사인 ST마이크로, 필립스에서 분사한 네덜란드 NXP, 미국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일본의 도시바와 후지쯔(최근 스펜션에 MCU 사업 매각) 등도 이 시기 전후로 ARM의 MCU 코어를 본격적으로 라이선스 받기 시작했다.

MCU 업계의 강자인 르네사스는 여전히 자사의 수퍼히타치(SH) 코어를 고집하고 있지만, 경영난에 따른 국유화가 이뤄지면 R&D 비용을 감축하기 위해 ARM 코어를 라이선스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들은 모두 독자 코어를 가진 업체들이기 때문에 ‘차별화’가 필요한 제품군에는 자사의 기술을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예컨대 인피니언과 프리스케일 등은 차량에 탑재되는 MCU에선 여전히 독자 코어를 고집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설계 간소화’와 주변 회로와의 쉬운 호환성이라는 이점을 제공하는 ARM 코어는 야금야금 산업으로, 차량용 시장으로 파고들고 있다.

동일한 코어를 가져다 쓴 제품이 많아지면 커머디티화(상품의 일용품화)를 피할 수 없다. 시장 진입 장벽은 낮아지고 제품은 상향평준화가 이뤄지며, 가격은 떨어진다. 이런 시장에선 삼성전자처럼 덩치가 크거나, 또 다른 경쟁력을 가진 업체만이 살아남는다. 무선 모뎀칩 묶음 상품을 무기로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시장에서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퀄컴이 좋은 예다.

언젠가 ARM과 인텔의 시장 경쟁을 다윗(ARM)과 골리앗(인텔)의 싸움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골리앗의 덩치는 여전히 크지만, 다윗은 충성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군대를 형성했다. 다윗이든 골리앗이든 커머디티화를 촉진시키는 건 매 한가지다. 커머디티화에 따른 불이익을 받지 않으려면 기술이든 고객사든, 시장이든 뭔가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한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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