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비상경영 속속 전환…삼성은 어떻게 극복했을까
그룹 총수의 부재로 일부 대기업이 비상경영 모드로 속속 전환되고 있다. 이에 따라 그룹의 비상경영 체제가 과연 오너 부재의 경영공백을 극복할 수 있는 실질적인 시스템인지 중요한 시험대에 오르게 됐다.
그러나 재계에서 이러한 비상경영 사례는 과거에도 여러번 있었다. 물론 비상경영체제가 위기대응에 성공적인 결과를 이끌어냈는지는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사안별로 참조할만한 부분도 적지않다.
삼성의 경우, 지난 2007년 12월 ‘삼성 특검’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이 일선에서 퇴진하면서 사상 초유의 위기대응팀 가동에 들어갔다. 당시 삼성은 이 회장 퇴진과 함께 그룹 전략기획실까지 해체함으로써 기존 콘트롤타워 기능을 완전히 개편하는 한편 ‘독립경영’체제로 전환하는 모험을 감수했다.
◆총수 부재의 시대, 비상경영 선언 = 지난 27일 대법 상고심 판결이후 SK그룹은 최태원 회장 형제가 일선에서 전격 퇴진했고, 앞서 한화그룹의 김승연 회장도 7개 계열사 대표이사직을 내려놓았다.
또 탈세·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은 CJ그룹의 이재현 회장도 오는 21일 예정된 이사회를 통해 CJ E&M, CJ CGV, CJ오쇼핑 등 3개 계열사의 등기이사에서 사퇴할 것이 유력하다.
SK그룹 최태원 회장은 지난 4일 SK,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SK C&C 등 계열사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난데 이어 5일에는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아예 회장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모든 직함과 직책을 내려놓음에 따라 결과적으로 최 회장은 SK 경영과는 무관한 대주주로만 남게됐는데 그 공백은 SK그룹의 집단지도체제인 수펙스(SUPEX)추구협의회가 대체한다.
◆강화되는 그룹 콘트롤타워 = 최회장의 퇴진으로 이제 SK그룹은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그룹 경영의 전면에서 활동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김창근 회장은 SK그룹 내에서 유일하게 ‘회장’ 직함을 가졌다.
실제로 SK그룹은 최회장의 일선 퇴진 발표와 함께 수펙스의 기능을 대폭 강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SK그룹은 그동안 그룹내 지주사인 SK가 맡고 있던 계열사 사업 관리·조정 업무를 수펙스추구협의회로 이관시켰다. 또 5일 SK그룹은 공시를 통해 SK수펙스추구협의회 임형규 ICT기술성장추진 총괄 부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했다고 밝혔다. 임 부회장은 삼성전자 사장 시절 당시 이건희 회장의 공백에 따른 비상경영체제를 직접 경험한 바 있다.
앞으로 수펙스추구협의회는 계열사 사업조정 등 구조조정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일각에선 과거 강력한 그룹 컨트롤타워 기능을 총괄했던 ‘구조조정본부’의 부활로 보는 시각도 있다.
수펙스협의회가 무늬만 콘트롤타워가 아니라 실질적 권한을 갖는 조직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이제 시장의 관심사로 남게됐다.
◆삼성 비상경영, 어떻게 했나 = 지난 2008년 4월, 삼성은 이건희 회장의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와 동시에 사장단협의회를 본격 가동시켰다. 사장단협의회는 그해 7월부터 가동되기시작했고, 산하에 투자조정위원회와 브랜드관리위원회를 두는 등 자율경영기조를 대폭 강화시켰다.
강력한 기능의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을 해체했다는 점에서 그 때부터 삼성은 ‘독립경영 체제’ 로 불려지긴 했지만 당시 시장에선 그룹 '2인자'로 불렸던 이학수 전략기획실장(부회장)과 김인주 전략지원팀장(사장)의 퇴진으로 콘트롤타워의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강했다.
그룹의 상황이 다르기때문에 두 그룹간의 직접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당시 삼성은 콘트롤타워인 수펙스 기능을 크게 강화하는 현재의 SK그룹과는 반대의 모양새다.
당시 삼성은각 계열사 CEO 중심의 독자경영을 기본축으로 하되, 사장단협의회를 통해 그룹 계열사 간 업무 협의와 비즈니스 공조 전략을 진행시켰다. 사장단협의회 직속으로는 업무지원실이 설치됐다. 당시 사장단협의회 산하 투자조정위원회는 삼성전자 이윤우 부회장이, 브랜드관리위원회는 이순동 사장이 각각 맡았다.
다만 당시 사장단협의회가 기존 전략기획실의 기능을 대체했는지는 그룹 주변에선 평가가 엇갈린다. 그룹 차원에서 수립해야할 장기 경영비전 설정, 계열사 간 중복사업 방지, 대규모 투자와 사업구조 조정, 방대한 인사관리 등의 핵심 과제는 결국 실질적으로는 오너십의 문제와 결부되기 때문이다.
오너의 경영공백과 비상경영체제라는 외형과는 별개로, 그룹내 몇몇 핵심 현안에 대한 의사결정들이 오롯히 CEO들의 자율, 독립경영의 결과물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비상경영의 한계 극복할 수 있을까 = 현재도 매주 수요일 아침, 서초동 삼성 본사에서는 사장단회의가 열리지만 몇년전 이건희 회장 부재시의 팽팽했었던 긴장감은 사라졌다.
지난해 12월, 그룹 사장단 및 임원 인사를 앞두고 최지성 그룹미래전략실장(부회장)등 그룹 핵심 수뇌부가 당시 하와이에 체류중인 이회장을 직접 찾아가 협의하는 모습은 그룹 경영의 의사결정에 있어 오너십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너십의 역할이 분명한 국내 대기업 경영문화에서 월급사장인 CEO들에게 공격적인 경영을 기대하기는 태생적으로 힘들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마침 2008년말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되고 국내 주요 대기업들의 실적이 추락했다. 특히 글로벌 경영에 비상들이 켜지면서 삼성 비상경영의 한계를 지적하는 위기론이 적지않게 제기됐고, 2010년 이 회장 복귀의 배경이 된다.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를 통한 비상경영에 일단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SK측은 그동안 수펙스를 통한 차별화한 경영문화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글로벌 사업부문, 미래 신사업 등 핵심 적인 의사결정에 있어 적극적인 대응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재 전폭적인 신뢰를 주기에는 미흡하지만 SK그룹의 집단경영 체제의 성공여부가 주목되는 것은 단 한가지 이유다.
오너십 중심의 기존 국내 대기업 경영관행을 탈피하고 전문경영인 중심의 경영문화가 과연 성공적으로 정착될 수 있느냐, 나아가 그것이 향후 새로운 대기업 경영 문화로 인정받을 수 있느냐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박기록 기자>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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