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리벨리온-사피온 합병에 업계 ‘화색’…왜? [소부장반차장]

고성현 기자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왼쪽)와 유영상 SK텔레콤 대표(오른쪽) [ⓒ각사 자료 취합]
박성현 리벨리온 대표(왼쪽)와 유영상 SK텔레콤 대표(오른쪽) [ⓒ각사 자료 취합]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SK텔레콤의 인공지능(AI) 반도체 자회사인 사피온과 리벨리온이 연합 전선을 구축한다. AI 칩 시장이 개별 기업이 아닌 국가대항전으로 변모하면서 치열한 생존 경쟁이 예고되고 있어서다. 이에 따라 개별적으로 나뉜 AI 칩 개발 여력을 모아 기초체력을 크게 확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양사 간 합병 추진에 따라 향후 칩 양산 로드맵이 어떻게 변화할지도 관심사다. 사피온과 리벨리온이 각각 TSMC, 삼성 파운드리 공정에서 칩을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SKT가 양사 합병법인의 최대주주가 될 가능성이 높은 만큼, TSMC와의 협력 관계가 강해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리벨리온과 사피온코리아는 양사 간 합병을 추진하고 오는 3분기까지 본 계약을 마무리하겠다고 12일 발표했다. 경영권은 리벨리온이 맡게 됐다.

'피바람' 예고된 AI 칩 시장…규모 키워 경쟁력 높인다

양사가 합병을 추진하는 주된 이유는 과열된 양상을 띠는 AI칩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의도로 해석된다. AI 모델을 구축하는 학습(Training)용 칩 시장은 엔비디아의 독점 구도로 굳혀진 반면, AI모델을 통해 입력값을 도출하는 추론(Inference)용 칩은 아직 시장 형성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이에 따라 세레브라스·그록·삼바노바·텐스토렌트 등 북미 1세대 AI칩 업체와 인텔, AMD와 같은 팹리스 거대 공룡이 경쟁에 뛰어든 상황이다.

국내에서도 리벨리온·사피온을 비롯해 퓨리오사AI, 딥엑스가 관련 시장에 뛰어들었다. 다만 개별 기업이 소규모인 탓에 글로벌 경쟁에 밀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소프트웨어·펌웨어, 칩 설계 인력 측면에서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는 데다, 국내외 등 해외로의 인력 유출 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서다.

AI칩의 주요 고객사인 CSP·하이퍼스케일이 북미에 밀집된 점도 부담이다. 인텔, 그록 등 주요 경쟁사들이 북미에 연고를 둔 만큼 고객 대응과 같은 접근성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다. 통상 칩 개발에 적게는 수백억원, 많게는 천여억원이 투입되는 점을 고려하면 대규모 CSP·하이퍼스케일향 공급은 필수적인 요소다.

이에 따라 양사가 이번 합병으로 핵심 인력 이탈 방지 및 시너지 향상에 초점을 맞추고, 자금 확보 여력도 확대하기 위한 의도로 풀이된다. 특히 리벨리온이 북미 등 글로벌 네트워크를 지닌 점과 사피온코리아가 미국에 모회사를 두고 있는 점 등을 적극 활용할 것이란 관측이다.

시장에서는 양사 간 합병이 이례적인 일이라는 시선이 지배적이다. 사피온·리벨리온에 각각 투자를 집행했던 SKT와 KT가 전통적인 통신 분야 경쟁사인 탓이다. SKT와 KT는 이번 합병 발표에서 국내 AI칩 기업의 기술 주권 확보, 세계적 수준의 기업 탄생을 위해 뜻을 같이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도체 업계는 양사 합병을 반기는 모양새다. 국내 시스템반도체 업계가 그동안 소규모·소자본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던 만큼, 합병에 따른 규모 확대가 산업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추론용 AI칩 생태계를 공동으로 꾸릴 수 있다는 측면에서도 이점이 있다. 추론용 AI칩은 아직 선두주자가 없는 무주공산의 시장이다. 다만 오랫동안 생태계를 꾸려 온 엔비디아가 여전히 우선순위에 놓일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엔비디아 외 진영에서의 생태계가 뿔뿔이 흩어져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사와 같은 인수·합병(M&A) 및 협력 사례가 나와야만 본격 경쟁이 가능하다는 관측도 있다.

사피온과 리벨리온 로고 [ⓒ각사 자료 취합]
사피온과 리벨리온 로고 [ⓒ각사 자료 취합]

통합법인 지배구조 형성에 이목 쏠려…파운드리 활용 여부도 관심사

양사 합병에 따라 향후 칩 개발 프로젝트가 어떻게 변화할 지 관심이 쏠린다. 양사의 칩 개발 생태계가 각각 삼성, SK로 나뉘어져 있어서다.

현재 사피온은 최신 칩 X330에 SK하이닉스의 GDDR6 D램을 탑재하고 TSMC를 통해 생산하고 있다. 반면 리벨리온은 하반기 양산할 '리벨'에 삼성전자의 고대역폭메모리(HBM)를 탑재하고, 생산 역시 삼성 파운드리를 통해 진행하고 있다.

양사는 올해 양산할 예정인 프로젝트는 그대로 유지하되, 차기작으로 개발 중이던 칩 개발 계획은 통합해 진행키로 했다. 이에 따라 사피온의 'X430', 리벨리온의 '리벨 쿼드' 개발 역시 중단되고 새로운 프로젝트가 추진될 것으로 예상된다.

리벨리온 관계자는 "제품과 관련해 조만간 양사에서 상대에 대한 기술적, 사업적 실사를 실시할 예정"이라며 "이 실사로 각자 제품과 인력 등을 파악해야지만 로드맵을 정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 논의된 개발 로드맵은 없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양사 통합법인의 지배구조에 따라 메모리·파운드리 활용 방향성이 정해질 수 있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공동 개발 제품의 비용 등을 고려했을 때, HBM이나 파운드리를 단일화하는 편이 유리하다는 이유에서다.

사피온코리아와 리벨리온이 합병할 경우 이 법인의 최대 지분은 사피온 미국법인이 쥐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피온 미국법인은 사피온코리아 지분을 100% 보유한 모회사다. 리벨리온의 기업가치가 약 8800억원, 사피온코리아가 약 5000억원이란 점을 고려하면 사피온 미국법인은 통합법인의 30% 내외 지분을 확보하게 된다.

사피온 미국법인은 SK텔레콤이 62.5%, SK하이닉스가 25%, SK스퀘어가 12.5%로 구성돼 있다. 통합법인이 별도 지분 변화 없이 추진된다면 사실상 SK 측이 최대 주주로 올라서게 되는 셈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양사 통합법인의 지분을 SK그룹에서 가져가는 구도가 된다면, 그동안 삼성 파운드리를 이용해왔던 리벨리온이 이탈해 TSMC로 합류할 가능성도 있다"며 "아직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은 만큼 지켜봐야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리벨리온, 사피온 측은 지분 구조 및 제품 로드맵에 대해 정해진 것이 없다는 신중한 입장을 내놓고 있다. 지배구조 및 합병 계약 등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은 만큼, 섣부른 추측을 경계하는 모습이다.

리벨리온 관계자는 "이제 막 합병 발표가 이뤄진 만큼 지분 구조에 대해서는 본계약 체결 전까지 확인이 어렵다"고 답했다. 사피온코리아 관계자 역시 "발표로 언급된 내용 이외에는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게 없다"고 밝혔다.

고성현 기자
naretss@ddaily.co.kr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디지털데일리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