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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제에 왜 정치논리 개입하는가”…‘민간자율 극복’ SK 이동통신 인수(下)

김문기 기자
노태우 회고록 (하)
노태우 회고록 (하)

[디지털데일리 김문기 기자] “그게 무슨 소리냐?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왜 정치 논리를 개입시키느냐. 제2이동통신 사업자가 누가 될지는 심사해 봐야 아는 일이다.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이니 소신을 갖고 추진하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이같이 밝혔다. 부총리를 중심으로 열린 경제관계 장관 회의에서 사업자 선정을 미루자는 의견이 제기된 데 따른 답이었다.

정치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기 때문에 지금 제2이통사를 선정하면 안된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송언종 체신부 장관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고 청와대는 일절 관여하지 말라는 원칙을 정해줬다고 회고했다. 송 장관에 대해서는 언제나 소신껏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이는 세간의 평가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는 '다시 한번 밝혀 두지만 실무진들이 청문회라도 서겠다난 각오로 엄정하게 추진한 것이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이었다’고 강조했다.


민간에 책임전가, 기업 역차별에도 '함구'

공정성을 담보한다고 하더라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김영삼 여당 대표와 야당의 특혜시비 공세를 버티기 어려웠다. 당시 야당이 추진한 2차례 국회 조사에서도 별 다른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공세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결국 대통령 비서실장은 SK에 ‘이동전화사업에 대한 권고’라는 비공개 문건을 보내기에 이르렀다. 이 문건에는 국론이 분열된 현 사태를 조속히 수습할 것을 권고하면서 통신사업권을 자진 포기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적법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허가했지만 대통령과 특수관계임을 이유로 정치권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라며 국론을 조속히 통일하고 정치사회 안전을 이룩하기 위해 협조하라라고 종용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아울러, 사업권 포기가 불러올 기업의 불이익과 관련해서도 ‘자기 책임 하에 구성주주들을 설득하라’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내용도 적시돼 있다.

만약, 적법한 절차가 정치적인 영향으로 인해 포기에 이르렀다면, 오히려 SK에 대한 당정의 역차별을 주장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손실을 감내하고 주주설득에 나선 것은 SK였다. 다만, SK는 오해받을 우려가 없는 다음 정권에서 실력을 다시 한번 인정받겠다고 강조했다.

기업뿐만 아니라 정부도 망연자실했다. 송언종 체신부 장관을 비롯해 심사에 참여한 중요 인사들은 모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 경제수석 역시도 사의를 표했다. 최소한의 잘못도 오해도 없었다는 의미였기 도 했지만 공직자의 마지막 양심이기도 했다. 당시 체신부 공무원들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는 후문이다.


정치 외풍에 소신 잃은 정부 불신 쌓은 기업…민간 자율로 돌파구 마련

SK의 사업권 반납은 다음 정권에서도 악영향을 끼쳤다. 과거 실패를 반복할 수 있다는 부담이 작용하기도 했거니와 소신을 잃은 정부와 이를 믿을 수 없는 기업의 애증관계는 쉽게 봉합되지 않았다. 경제가 정치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셈이다.

당시 윤동윤 체신부 장관은 이같은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한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단일 컨소시엄 방식이 민간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고 많은 기업들이 참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단일컨소시엄 구성을 민간경제 5단체 가운데 전산업 분야의 대표성과 자율조정 능력이 가장 높은 전경련에 의뢰하기로 했다. 여기에 한국통신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이동통신 주식지분 64% 가운데 민간업체가 경영권을 획득하는데 충분한 규모의 주식인 45% 이내 매각을 검토했다.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도 함께 추진하겠다는 복안이었다.

이같은 체신부 결정은 기업의 불만을, 기업 스스로가 선정할 수 있게 하는 한편, 각 컨소시엄을 주도한 재벌그룹의 경쟁을 억제해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는 묘수였다. 한국이동통신 민영화도 유연한 조정이 가능했다. 사실상 체신부의 결정은 기업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도였다.

기업의 선택지는 2개였다. 단일 컨소시엄에 참여한다면 주주구성에서 1대 주주로 올라서야 한다는 경쟁 미션이 주어진다. 다른 방법은 한국이동통신 주식 매입을 통한 경영권 인수인데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실제로 한국이동통신 주식매각공고를 앞두고 주가가 폭등했다. 2차 이통사 선정을 발표하기 전까지만해도 15만원 수준이던 주가는 1개월만에 23만원대로 늘어났다. 전체 30% 해당하는 160만 주가 2400억원 수준이었으나 3800억원까지 늘어난 셈이다.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주가가 계속해서 올라갔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이동통신을 노렸던 포항제철과 코오롱, 쌍용 등이 주식매입에 따른 자금부담이 상당해 계획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중) [사진=SK그룹]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중) [사진=SK그룹]

갓 끈 고쳐 매기 위해 오얏나무서 멀리 떨어진 SK그룹…최종현 회장의 용단

전경련은 체신부의 이같은 정책 결정에 바쁘게 움직였다. 체신부가 부여한 시간은 2개월. 결과를 내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다. 하지만 구성에 실패한다면 정부로 공이 넘어갈 수 있었다.

1994년 새해가 밝자 전경련은 1월 11일 단일 컨소시엄 구성을 위한 1차 회의를 개최했다. 그 후 17일 SK가 깜짝 발표에 나섰다. 단일 컨소시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1차 제2이동통신사 선정에서 압도적인 점수를 받았던 SK의 포기는 업계의 의아함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모두가 예상치 못한 처사라고 고개를 저었다.

이같은 판단에 대해 세간에서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의 용단이라고 평가했다. 최 회장은 이동통신 사업 영위를 위해 단 하나의 오점도 남기지 않겠다고 피력해온 바 있었다. 공교롭게도 1차 선정에서 고배를 마신 SK그룹은 2차 선정 때도 이같은 오해를 살 수 있었다. 당시 전경련 회장이 바로 최종현 회장이었기 때문. 단일컨소시엄 구성에 SK그룹이 1대 주주로 올라선다면 최 회장이 또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물론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SK그룹 입장에서는 부담이 적고 유력한 단일컨소시엄이 유리했지만 한국이동통신을 선택한다면 재무적인 상당한 리스크를 안아야 했다.

SK그룹의 깜짝 발표 이전인 15일 기업의 대표들이 모인 승지원 결의에서도 최 회장은 “재계가 단합된 모습을 보이고 국민과 정부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선경의 제2이통사 참여 포기가 불가피하다”라고 회장단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함께 참여하고 있던 회장단이 이같은 최 회장을 결단을 말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룹 내에서도 자금 부담으로 인해 최 회장의 결단을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최종현 회장은 인수금액에 대한 부담을 인정하면서도 단일컨소시엄 포기와 관련한 고민을 허심탄회하게 풀어놨다. 정보통신 사업 진출이 비용 부담을 이길 정도로 중요하고, 진출 자체가 금액으로 환산하기 어려울만큼 값지다고 설득했다.

이에 따라 SK그룹은 한국통신의 한국이통동신 주식 매각 입찰 마지막날인 1월 25일 오후 가까스로 입찰에 참여했다. 유공과 흥국상사, 선경인더스트리 등 3개 계열사를 통해 437억 원의 입찰보증금을 납부했다. 26일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23%인 127만5000주를 4271억 2500만원에 매입키로 했다.

SK그룹이 단일컨소시엄에서 제외되면서 기업간 경쟁이 소폭 내려갔다. 결과적으로 포철이 15%, 코오롱이 14%의 지분을 획득하는 선에서 제2이동통신사를 위한 컨소시엄이 기간 내 구성되는데 성공했다.

선경그룹은 1994년 3월 16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 매입금 4271억2000만원을 납입했다. 주식 매입금은 관계사인 유공과 선경인더스트리, 흥국상사가 나눠 분납했다. 다만,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 33%에 대한 매각이 유찰되면서 한동안 경영권을 가져올 수 없었다. 이후 같은 해 6월 2일 한국이동통신의 주식이 증권시장에 매각됨에 따라 비로소 선경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의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최종적으로 7월 7일 선경그룹은 한국이동통신 임시주주총회를 개최하고 경영권을 최종적으로 취득했음을 알렸다.

우리나라 제2이동통신사 선정은 대내외적인 어려움에 봉착해 자립역량을 배양하기 위해 추진했으며, 이에 따라 민관이 협력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중요한 사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기업과 관련자들이 국내 정보통신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며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경제적인 부흥에서 시작해 정치적인 영향으로 꺾였으나 다시 경제적 관점에서 이를 극복한 일례이기도 하다.

김문기 기자
moon@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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