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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임종룡 회장, '無信不立' 외치기전에 진솔한 사과 먼저

박기록 기자
지난 12일 우리금융 본사에서 열린 2024년 하반기 그룹 경영전략워크숍에서 우리금융그룹 임종룡 회장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금융
지난 12일 우리금융 본사에서 열린 2024년 하반기 그룹 경영전략워크숍에서 우리금융그룹 임종룡 회장이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우리금융

[디지털데일리 박기록기자] 경기도 남양주 금곡에 위치한 홍유릉은 대한제국 고종 황제 부부의 무덤인 홍릉(洪陵), 그리고 아들 순종의 무덤인 유릉(裕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올해 1월1일, 조병규 은행장 등 우리은행 경영진은 이 홍유릉 참배로 새해를 시작했다.

홍유릉 참배는 지난 2012년부터 생긴 우리은행의 전통으로 ‘우리은행 설립의 참뜻을 되새기며 한 해를 시작한다’는 각오가 담겼다.

그런데 왜 하필 고종황제일까.

고종 황제가 다름아닌 1899년, 현재 우리은행의 전신인 대한천일은행(大韓天一銀行) 탄생을 이끈 산파역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고종 황제는 황실 운영자금을 자본금으로 내놓고 개화기 우리 상공인들을 지키기위한 은행 설립을 주도했다.

대한제국 중앙은행의 역할까지 겸했던 대한천일은행은 현재의 우리은행에 이르기까지 이후 여러번 명칭이 바뀌었지만 125년간 상업자본 육성, 금융 주권 회복, 국가 경제 부흥을 위해 시대적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올해 초, 우리은행은 경영진의 참배 소식을 전하면서 지난 대한천일은행의 역사를 '우리금융의 헤리티지'(Heritage, 遺産)라고 표현했다. 국가의 명예와 민족에 대한 헌신, 시대적 가치가 담긴 존귀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렇게 빛나는 전통을 뒤로하고 최근 몇년간 우리은행 역사에 먹칠을 하는 충격적인 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내부 직원이 기업 예치금 670억원을 수차례 나눠 몰래 빼내 쓰다 적발된 초대형 횡령 사고가 드러난 것이 불과 2년전이다. 그 여파로 당시 우리금융 회장과 우리은행장까지 옷을 벗어야하는 후폭풍이 있었다.

이후 임종룡 회장 취임이후 고강도의 내부통제시스템까지 정비해 이제는 더 이상 그럴일이 없을 것이라던 다짐도 무색하게 올해 또 다시 경남 김해지점에서 100억원 대에 달하는 횡령사고가 발생했다.

여당인 강민국 의원(경남 진주을)마저 최근 '금융감독원이 우리금융그룹에 대한 고강도의 특별 감사가 시급하다'고 요구할 정도로 정치권도 격앙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금융그룹은 임종룡 회장이 지난 12일 서울 회현동 소재 본사 비전홀에서 ‘2024년 하반기 그룹 경영전략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날 그룹 자회사 대표, 전략담당 임원, 그룹 우수직원 등 임직원 약 120명이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자리였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워크숍 이후, 지난 14일 우리금융은 '선도금융그룹 도약 위해 온 힘으로 분투하겠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평소보다 유독 신파조에 가까운 표현들이 많아 읽기에 불편했지만 최근 대형 불법횡령 사고 등으로 코너에 몰린 우리금융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었다.

이에 따르면, 우리금융측은 임종룡 회장이 30여 분에 걸쳐 하반기 우리금융의 나아갈 길을 발표하고 고객신뢰 회복을 다짐하는 장으로 마무리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간접화법의 형식을 빌어 지난달 발생한 100억원대 횡령 사고와 관련한 임종룡 회장의 발언을 디테일하게 전달했다.

즉, '임종룡 회장이 지난달 발생한 영업점 금융사고를 두고 ‘뼈아픈’이라는 표현을 통해 심각성을 재차 강조했으며, 임직원 모두 절벽 끝에 선 절박한 마음으로 자성하고 무신불립의 신념으로 내부통제 강화와 윤리의식 내재화에 나서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고 전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믿음을 잃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또한 ‘리스크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관리해 나가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관련 정책과 시스템을 정비해 어려운 상황에 선제적으로 대비할 것을 당부했다'고 나열했다.

특히 "워크숍 마무리 순서에서 임 회장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뜻을 가진 ‘분투’(奮鬪)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비장함이 감돌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아무리 자세히 보도자료 내용을 살펴봐도 이번 100억원대 횡령 사고에 대한 임 회장의 진솔하거나 통렬한 반성의 느낌을 주는 워딩은 없었다. 오히려 내부통제와 관련해선 남 얘기하듯 한 '유체이탈 화법'에 가까웠다.

"'뼈아픈'이라는 표현을 통해 심각성을 강조했다"고 전한 것을 과연 진정한 사과라고 볼 수 있을까.

그러면서 이날 워크숍과 관련해 우리금융 홍보팀은 딱 1장의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 파일을 열기전, 깊게 고개 숙인 임 회장의 모습을 상상했었지만 그런 사진은 없었다. 사과하는 장면을 연출할 좋은 기회를 날려버린 우리금융 홍보팀의 실수인지, 아니면 생각이 그에 못미쳤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만약 처음부터 생각이 그에 못미쳤다면 이는 심각한 공감능력의 부재다.

요즘 우리는 유난히 '사과'에 인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신용과 신뢰'에 대한 무한책임을 업의 본질로 삼고 있는 금융회사의 수장으로서, 진솔한 대국민 사과가 '무신불립'보다 순서상 당연히 먼저다.

그것이 125년 전통에 빛나는 우리금융의 헤리티지를 지키는 것이다.

박기록 기자
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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