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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500만장 팔린 명작, 국내선 ‘도박물’… 게임위 “변화” 공염불

문대찬 기자
글로벌에서 500만장 판매고를 올린 발라트로. [ⓒ스팀]
글로벌에서 500만장 판매고를 올린 발라트로. [ⓒ스팀]

[디지털데일리 문대찬기자] “게임 등급 분류를 한지 20년이 지났으면 판단이 달라지는 부분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시대 흐름에 부합하는 방안을 깊이 고민하고 있다.”

서태건 게임물관리위원장은 작년 11월, 취임 후 가진 첫 공식 기자간담회에서 소통과 신뢰, 변화에 입각한 3가지 핵심 사업과 17개 주요 실천 과제를 발표하며 변화를 약속했다.

그는 특히 게임위의 고질적 한계로 거론됐던 전문성 강화에 초점을 맞춰 쇄신에 나서겠다고 강조했다. 심의 과정에 게임전문가 참여를 확대하고, 개발자·이용자를 중심으로 게임전문가 패널을 구성해 등급기준 적정성을 자문하는 절차를 신설․운영하겠다고 했다. 글로벌 수준에 부합하는 체계도 만들고, 모니터링 요원 대상 전문역량 및 교육도 강화하겠다고 전했다.

그러나 전문성, 기준 없는 규제 기관이라는 꼬리표를 벗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듯 하다.

게임위는 작년 2월 출시된 게임 ‘발라트로’에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을 부여했다. 그해 9월 출시된 모바일 버전에는 최초 전체 이용자 등급을 매겼다가 청소년 이용불가로 변경했다.

발라트로는 해외 개발사 로컬썽크가 개발한 포커 족보 기반 덱빌딩 로그라이크 게임이다. 글로벌 누적 판매량 500만장을 돌파하고, ‘올해의 게임’ 후보에도 오른 명작이다.

한국만 발라트로를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으로 분류한 것은 아니다. 유럽 등급분류 기구 중 하나인 PEGI 역시 이 게임에 18세 이상 이용가를 부여했다.

게임위가 작년 11월 발표한 핵심 3대 방향. [ⓒ게임위]
게임위가 작년 11월 발표한 핵심 3대 방향. [ⓒ게임위]

다만 게임을 깊게 들여다보고, 또 명확한 기준에서 판단했느냐는 의문이다.

게임위가 발라트로를 청소년 이용불가로 판단한 이유는 ‘직접적인 사행행위 모사’다. 강유정 의원실에 따르면 당시 심의 위원들은 게임 내용 전반에 사행행위 모사가 있는 것 같다고 판단했다. 포커 게임룰을 변형한 게임인 데다, 보상 방식도 배당 행위와 유사하다고 봤다. 투표 결과 15세 이용가 2표, 청소년 이용불가 4표로 청소년 이용불가 게임이 됐다.

그러나 발라트는 기본 족보와 일부 용어를 제외하곤 포커와 게임성이 크게 다르다. 보스 요소, 로그라이크 규칙 등 게이머들에게 친숙한 요소도 다수다. 도박과 같은 환금성 요소도 전혀 없다. 사행성이라는 외피만을 문제 삼아 게임의 실제 가치와 맥락을 간과한 셈이다.

발라트로 개발자는 앞서 PEGI가 게임에 18세 이상 이용가 등급을 매긴 것과 관련해 의미심장한 쟁점을 던지기도 했다. 그는 “18세 등급보다, EA스포츠 'FC' 시리즈처럼 실제 도박 매커니즘을 가진 게임이 3세 이용가를 받은 것이 더 화가 난다”면서 “우리도 소액 결제와 루트박스, 실제 도박을 추가해 3세로 등급을 낮춰야겠다”고 말했다.

게임의 본질을 보지 못한 채 외형적인 요소에만 집중하는 제도권의 행태를 꼬집은 것이다.

일각에선 게임위가 법적 근거를 넘어 과도한 판단을 내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8조는 ‘사행행위의 모사 및 사행심 유발의 정도가 유해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게임물’을 등급분류 기준으로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사행행위 모사 여부는 전체 이용가부터 15세 이용가까지의 등급을 결정하는 데만 적용된다. 단순히 사행행위를 모사했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 이용불가 등급을 부여한 것은 과도하다는 해석이다.

북미 심의 기구 ESRB는 발라트로에 전체 이용가 등급을 부여했다. 독일의 USK는 12세 이용가로 분류했다. 일본은 전체 이용가다. 선진국 주요 심의 기관들이 비교적 유연한 기준을 적용한 것을 감안하면, 변화와 쇄신을 강조했던 게임위의 이번 결정은 아쉬움을 남긴다.

게임은 해를 거듭할수록 입체적이고 복잡하게 변하고 있다. 급변하는 환경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낡은 규제 기관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긴 힘들다. 게임위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유연하고 공정한 심의 체계를 마련해 신뢰받는 기관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문대찬 기자
freez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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