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삼성 반도체 성공 신화…여전히 믿기지 않는 일들

한주엽 기자

[IT 전문 블로그 미디어=딜라이트닷넷]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 전무이사 출신인 신용인 박사가 낸 ‘삼성과 인텔’(2009년 출간)이라는 책을 즐겁게 읽었다. 랜덤하우스코리아가 낸 340페이지짜리 책인데 반도체 산업의 생생한 현장 경험과 인사이트가 농축돼 있다. 신 박사는 삼성전자로 자리를 옮기기 전 인텔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삼성전자와 인텔의 기업 철학 비교, 성공과 실패 사례, 현재의 딜레마 및 미래 성장 전략을 이 책에 풀어냈다. 기업혁신분야의 세계적 권위자인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미국 하버드대 경영학과 교수는 추천사를 통해 “위대한 회사들이 직면한 새로운 위협과 기회를 한 권에 책에 담아냈다는 점이 나를 매우 기쁘게 했다”라고 이 책을 호평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이나 인텔에 입사하길 원하는 대학생, 혹은 반도체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 동안 삼성과 관련된 다수의 책을 읽었는데 고위직으로 근무했던 이들이 펴낸 책을 읽을 때면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을 알 수 있어 좋다. 처음 이 책을 펴고 4시간을 내리 읽어가면서 뽑아둔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의 비화 9가지를 소개한다.

#1
1983년 이병철 선대 삼성 회장이 일본 도쿄에서 반도체 사업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겠다는 발표를 했을 때 주변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일본 미쓰비시 연구소는 한국의 작은 내수 시장, 빈약한 관련 산업과 간접 자본, 삼성의 낮은 기술력과 규모 등 5가지 이유를 들어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실패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 같은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까지는 D램이, 2000년대에는 D램과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이 성공을 거두면서 삼성전자는 세계적인 반도체 업체가 됐다. 삼성전자는 현재 인텔에 이은 세계 반도체 시장 2위 업체다.

#2
삼성이 기흥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던 초창기 시절 일이다. 경부고속도로 기흥 IC에서 공장까지 도로 포장이 안돼있던 탓에 수십억달러짜리 고급 반도체 장비 운송에 문제가 생겼다. 삼성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도로를 한나절 만에 포장했다고 한다. 김광호, 이윤우 전 부회장, 김재욱 전 사장, 조수인 현 사장, 류병렬 전 부사장과 같은 주역들은 당시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는지 지금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고 한다.

#3
1986년 미국 반도체 업체인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는 삼성전자가 자사의 D램 특허를 침해했다며 소송을 걸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소송에 져 그해 영업이익의 80%가 넘는 8500만달러를 배상금으로 물어냈다. 삼성전자가 특허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도 이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TI는 한국, 일본, 대만의 메모리 업체들로부터 10억달러가 넘는 특허 로열티를 받아 챙겼다. 재정 위기를 로열티로 극복한 TI는 특허로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독립 부서를 창설했는데, 이는 특허로 돈을 뜯어내는 ‘특허괴물’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970년대 D램을 최초 개발한 인텔은 같은 기간 1억달러도 안 되는 특허 수입을 올렸다.

#4
1987년 이병철 선대 회장이 사망한 후 삼성 그룹의 몇몇 사장들이 당시 신임 이건희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포기할 것을 제안했다가 크게 혼이 났다고 한다. 그 다음해인 1988년에는 그 동안 삼성반도체에 투자했던 돈 이상을 반도체 사업에서 벌어들였다.

#5
삼성 반도체는 1983년 미국 아이다호 주에 있는 마이크론 테크놀로지와 64K D램 설계 및 제조기술을 이전받는 계약을 맺는다. 당시 이윤우 연구소장을 비롯한 몇몇 삼성 엔지니어들이 현지에서 어렵게 64K D램 기술을 배웠다. 동행했던 당시 조수인 과장(현 사장)은 방문자 명단에 이름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해 회사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텔에 묵으면서 기술을 익혔다고 한다. 마이크론에서 배운 기술을 토대로 64K D램을 생산하는 것은 삼성 반도체의 사활이 달린 중요한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이윤우 연구소장을 중심으로 10개월간의 노력 끝에 생산에 성공했다. 한국의 64K D램 생산 성공은 미국과 일본의 뒤를 잇는 것이었다. 1992년 삼성전자는 당시 진대제 이사의 주도 하에 독자 기술로 64M D램 개발에 세계 최초로 성공, 약 9년 만에 미국과 일본의 기술력을 따라잡게 된다.

#6
1990년대 플래시메모리의 주류는 노어플래시였다. 낸드플래시는 시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삼성전자가 낸드플래시 시장에 뛰어들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1990년대 비휘발성 메모리 개발을 담당했던 당시 임형규 이사는 시장에서 각광받던 노어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하기 위해 인텔, AMD와 같은 회사에 제2공급자(생산 대행과 같은 뜻,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업계에선 통용된다) 역할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삼성은 ‘꿩 대신 닭’과 같은 심정으로 도시바를 찾는다. 낸드플래시 기술을 갖고 있던 도시바는 삼성전자에 제2공급자 지위를 허락했고, 삼성전자는 이 일을 계기로 낸드플래시 시장에 발을 담그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하면서 낸드플래시는 전성기를 맞는다. 신윤승 당시 부사장과 메모리사업부장이었던 황창규 사장의 발 빠른 투자 전략으로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시장 1위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7
1990년대 중반 진대제 당시 사장은 미국 DEC와 계약을 맺고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제2공급자가 됐다. 삼성전자는 보스턴 주위에 본부를 두고 수십 명의 엔지니어를 급파해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런데 2000년대 초 DEC가 망하면서 삼성전자의 알파 마이크로프로세서 사업도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다만 삼성전자는 이러한 경험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생산 및 조립, 테스트 같은 엔지니어링 능력을 배우게 됐다.

 

당시 삼성전자 내부에선 마이크로프로세서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인텔의 경쟁사인 AMD를 인수합병(M&A)하자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인텔과 마찰이 빚어지면 100억달러 규모의 D램 사업에 부정적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로 이 같은 목소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x86 마이크로프로세서로 PC 생태계를 꽉 쥐고 있는 인텔은 사실상 D램 표준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갖고 있었다. 앞서 진대제 사장은 인텔 앤디 그로브 사장에게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제2공급자가 되고 싶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앤디 그로브 사장은 “우리 기술을 훔쳐갈 심산이냐”며 그 자리에서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8
D램은 경쟁이 심해 다른 반도체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빨리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생산과 출하량이 늘더라도 전체 매출액은 제자리걸음을 할 때가 많다. 1990년대 삼성전자 반도체와 SK하이닉스 등 D램 회사들이 가격을 담합했다 해서 5명의 삼성 반도체 임원들이 2000년대 중반 미국 캘리포니아 감옥에서 형을 치르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9
지금의 삼성 반도체를 만든 인물은 다음과 같다. 김광호 전 부회장은 1980년대 삼성에서 반도체 사업을 맡아 키운 장본인이다. 이윤우 전 부회장은 64K D램 개발 등 삼성 반도체의 산 역사다. 진대제 전 사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부터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발탁되면서 삼성을 떠났지만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이건희 회장이 만명을 먹여 살리는 리더라도 칭할 정도로 신임을 얻었다.

 

임형규 전 사장(현 고문)은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를 궤도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MIT 공학박사 출신인 황창규 전 사장은 낸드플래시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메모리 용량이 1년에 두 배씩 증가한다는 ‘황의법칙’을 만들어냈다. 권오현 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디스플레이구동드라이버IC 사업을 1등으로 키워냈고 현재 삼성전자의 부품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앞서 언급된 조수인 사장은 메모리사업부장,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삼성디스플레이 OLED 사업부장을 역임한 뒤 올 연말부터 삼성전자 의료사업부장이라는 중책을 맞게 됐다. 전동수 현 메모리사업부장과 우남성 시스템LSI 사업부장은 자타가 공인하는 해당 업계의 ‘구루’들이다.

[한주엽기자 블로그=Consumer&Prosumer]

한주엽 기자
webmaster@ddaily.co.kr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디지털데일리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