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이상일기자] 벤더 드리븐(Vender Driven)이라는 말이 있다. 국내 IT시장에서 한 때 주요하게 회자되던 용어로 ‘업체 주도 시장’이라는 의미다. 새로운 IT기술을 IT업체가 국내에 들여오고 이를 기업에 제안해 시스템의 고도화는 물론 관련 시장을 개발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국내에서의 벤더 드리븐은 주로 외국계 IT회사들이 이끌어왔다. 성공과 실패 여부를 떠나 국내에서 생소했던 서비스기반아키텍처(SOA)에서 최근의 하이컨버지드 아키텍처(HCI)까지 다양한 IT기술이 시장과 더불어 성장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벤더 드리븐이라는 말 자체는 국내에 진출한 IT 글로벌 기업의 역사와 성과이기도 하다.
이러한 벤더 드리븐 시장은 외국계 IT기업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한국후지쯔, 한국IBM, 한국 오라클 등 1세대 국내 진출 IT기업들 역시 벤더 드리븐 시장을 이끌었다. 벤더 드리븐을 위해선 해당 벤더를 한국 시장에서 이끄는 지사장들의 역할이 중요했다.
특히 한국IBM은 당시 IT사관학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수많은 글로벌 IT업체 지사장들이 배출됐다. 이후 한국HP가 IT사관학교로의 역할을 해 왔지만 HP가 뿔뿔이 해체되고 난 후 명맥을 찾기 힘들어졌다.
반면 한국오라클은 한국IBM에 가려지긴 했지만 수면 밑에서 다양한 인재를 배출해왔다. 특히 최근 들어 과거 한국오라클 마케팅 담당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벤더 드리븐 관점에서 기술을 바탕으로 시장 전략 및 마케팅을 다뤄왔던 멤버들이 글로벌 IT업체들의 한국 지사장으로 연이어 승승장구 하고 있다.
한국오라클의 초기 시장을 이끌었던 1990년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에 한국오라클 마케팅팀에 근무했던 인원 중 7명이 전현직 외국계 IT기업 지사장을 역임하거나 재임 중이다. 당시 마케팅 팀에 근무했던 인원이 12~13명 내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반 이상이 지사장으로 배출된 셈이다.
넷앱 지사장, EMC 본부장, 현대 BS&C, NKMAX, 델테크놀로지스 사업담당 전무를 거쳐 다올티에스에서 회사를 이끌고 있는 홍정화 대표를 비롯해 오토데스크, 어도비, 구글클라우드 지사장을 지낸 최기영, 더블에이지 지사장 조준구, 소프토모티브 지사장을 지낸 이문형, 아크로니스 지사장 서호익, 폼랩 지사장 김진욱, 최근 퀘스트소프트웨어 지사장으로 선임된 윤병훈씨까지 모두 한 팀에서 근무했다.
당시 팀의 맏형이었던 홍정화 대표는 “오라클시절 함께 근무했던 직원들이 모두 성장해 6명이나 지사장이 됐다. 단일 회사도 아닌 단일 팀에서 지사장이 7명이나 배출된 것은 전무후무 하지 않을 까 싶다”며 “90년대에서 2000년 초 한국오라클 마케팅팀은 제품, 커뮤니케이션(광고 홍보), 마케팅, 인텔리전스, 플래닝 등 마케팅 관련 모든 기능을 수행하던 당시 보기 드문 조직이었다”고 회고했다.
특히 그는 “당시 마케팅-리드발굴-기회전환-공략-클로징이라는 전 사이클을 경험하면서 마케팅출신이 지사장으로서 차별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마케팅출신은 새로운 것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을 길러 도전하는 방법을 배운다. 때문에 변화를 파악하고 적응하는 것에 빠르다. 또 중요한 것이 마케팅을 하게 되면 가장 폭넓은 네트워크를 보유하게 되는데, 고객, 파트너, 미디어, 협회/단체 등 거의 모든 커뮤니티와 접촉해 영업기회를 발굴할 기회도 갖게 된다”고 말했다.
당시의 오라클 마케팅 팀 이러한 부분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홍 대표는 “기획부터 공급까지 한 조직에서 담당했다. 고객 사례발굴, 세미나 발표, 기자 간담회 등 제품에 관련한 모든 업무를 수행한 만큼 시장, 트렌드, 수요처, 파트너 관리까지 모든 것을 알아야 했다”며 "지금 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 지사장에게 요구되는 업무 능력을 이미 경험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다.
물론 지사장의 역할도 최근 들어 변하고 있다. 과거 지사장의 역할은 조직 전체를 이끌고 맨 앞에서 제품 판매를 견인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때문에 마케팅도 직접 챙기는 올라운드 플레이어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최근 지사장의 역할은 제품 판매보다는 백오피스 지원 업무가 중요해졌다.
다만 이러한 지사장 역량을 키워줄 만한 글로벌 IT기업들의 국내 운영 방식이 예전과 달라지고 있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그는 “예전의 IBM, HP, 오라클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은 조금씩 다른 형태로 국내에 운영되면서 많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하지만 지금은 신입이나 초보 경력자들이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IT벤더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며 “최근 국내 지사들이 ‘자율성’을 많이 잃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은 다르다’라는 말이 본사에 먹히지 않는다고 한다. 본사의 입김이 세지면서 국내에서 지사들의 운신의 폭이 자유롭지는 않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