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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① 성인 남성 크기가 단 3㎝로…시계만 봐도 엡손 보인다 [DD전자상가]

나가노(일본)=백승은 기자

엡손의 쿼츠 시계 시제품.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쿼츠 시계 시제품. [출처=디지털데일리]

[디지털데일리 백승은 기자] “1960년대 당시 ‘쿼츠(수정진동자를 이용하는 방식)’ 시계는 성인 남성 키를 훌쩍 넘는 210센티미터(cm) 정도였습니다. 엡손은 10년 만에 쿼츠 시계의 크기를 단 3센티미터(㎝)로 줄이는 획기적인 기술력을 선보였죠.”

높은 산과 바다만큼 큰 호수로 둘러싸인 일본 나가노현 스와. 이곳 엡손 본사에 위치한 스와 기념관에는 세계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를 비롯해 온갖 과거의 ‘시간’들을 만나볼 수 있다. 엡손 창업자인 야마자키 히사오는 “스와 지역의 시계 산업을 확립하겠다”라는 목표를 앞세우고 기계식 손목시계에서 시작해 디지털 프린트, 프로젝터, 로봇까지 뻗어나갔다.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스와 기념관은 올해 2월 일본의 유형문화재로 등록됐다.

일본 세이코엡손이 이끄는 엡손 그룹은 전 세계 81개 회사, 8만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작은 기계식 시계를 다루던 기업이 어떻게 연 매출 100억달러(약 13조원)를 달성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22일 엡손 스와 박물관 기념관을 직접 방문하고 엡손의 일대기를 되짚어 봤다.

◆1940년대 첫 손목시계에서 출발…올림픽의 ‘시간’ 되다

엡손의 스와 기념관.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스와 기념관. [출처=디지털데일리]

스와 지역은 한국으로 치면 강원도의 평창, 유럽에 비유하면 스위스와 같은 곳이다. 엡손은 이곳에서 1940년에 첫 발걸음을 디디고 역사를 써 내려갔다. 1942년, 미소(된장) 만드는 공장이었으나 그해 시계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시계는 작고 가볍되 매일 일정하고 정확하게 시간을 나타내는 게 핵심 기술이다. 엡손의 기술 경영 철학인 ‘고효율 ·초소형·초정밀’도 시계 기술에서 처음 등장했다. 또 매우 작은 부품을 다뤄야 하므로 먼지나 이물질이 없는 스위스와 같은 청정 지역에서 주로 발전했다.

스와 역시 시계 산업이 발전하기에 적합한 환경을 갖췄다. 엡손 본사에 근무하는 관계자는 “스와는 도쿄와 거리가 멀지 않아 이동에 용이하고, 호수를 낀 맑은 자연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시계 산업이 확대되기에 최적의 공간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창업자인 야마자키는 공장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일본은 대부분 목조 건물로 이루어졌는데, 화재 사고를 염려해 매일 아침마다 화재 점검을 나설 정도였다.

엡손의 첫 손목시계.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첫 손목시계.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마블' 시계.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마블' 시계. [출처=디지털데일리]

이와 같은 정성에 힘입어 1942년에는 첫 시제품이 나왔고, 1946년 엡손의 첫 번째 시계가 탄생했다. 이후 등장한 ‘마블’ 시계는 6400엔으로, 당시 직장인의 한 달치 월급에 맞먹을 만큼 고급 제품이었다. 현재 가치로는 300~400만원 정도다.

스와 기념관에 있는 사진. [출처=디지털데일리]
스와 기념관에 있는 사진. [출처=디지털데일리]

기술을 인정받아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엡손의 인쇄 타이머가 공식 타이머로 활용되기도 했다. 빠르고 정확한 시간 측정이 관건인 올림픽의 공식 ‘시간’, 타임키퍼로 선정되며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 1968년 제네바 천문대가 개최한 시계 경연대회에서는 4위부터 23위까지 모두 엡손 제품이 차지하며 단일 회사로는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쿼츠 시계 변천사. [출처=디지털데일리]
쿼츠 시계 변천사. [출처=디지털데일리]

1960년대 말에는 또 한 번의 기술적 도약을 해냈다. 210cm에 달하던 쿼츠 방식의 시계를 점점 작게 구현해 1969년 3㎝에 불과하는 손목시계로 만들어낸 것.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중반까지 쿼츠 시계는 방송사와 같은 특수한 공간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를 기점으로 쿼츠 손목시계 대중화가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목시계가 프린터로, 시계의 LCD가 프로젝터로

시계에서 시작된 기술의 발전은 프린터, 프로젝터, 로봇 등으로 이어진다. 엡손 현지 관계자는 “엡손 시계에서 측정한 기록을 출력하기 위해 프린터가 개발됐고, 또 손목시계에 포함된 액정표시장치(LCD)에서 영감을 얻어 LCD 프로젝터가 탄생했다”라고 설명했다.

엡손의 첫 프린터 ‘EP-101’.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첫 프린터 ‘EP-101’. [출처=디지털데일리]

기록된 시간을 출력하기 위해 개발된 것이 엡손의 첫 프린터 ‘EP-101’이다. 당시 기존 프린터보다 20분의 1의 전력만을 사용해 경쟁력을 갖춘 제품으로 인정받았다.

엡손의 첫 프로젝터. [출처=디지털데일리]
엡손의 첫 프로젝터. [출처=디지털데일리]

이 첫 프린터에서 엡손이라는 명칭이 유래했다. EP는 전자식 프린터(Electric Printer)를 뜻하며, Son은 다양한 분야에서 더 나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의 가치를 계승하려는 기업의 의지를 담고 있다. 이후 1989년에는 손목시계에 부착되는 LCD 기술을 활용한 최초의 프로젝터가 탄생했다. 현재까지도 프로젝터는 엡손 매출의 60% 이상을 견인하고 있다.

사업 영역도 조금씩 확대되기 시작했다. 1975년에는 엡손 미국 지부를 시작으로 유럽, 아시아 등으로 확장해 나갔다. 1998년에는 중국, 한국 지부가 탄생했다. 이렇게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에서 시작한 엡손은 2022년에는 글로벌 81개 회사, 8만여명의 직원, 연 매출 13조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나가노(일본)=백승은 기자
bse1123@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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