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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중소중견이 이끌어 온 전기차 충전사업, 대기업 참여 영향은?

이건한 기자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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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 요즘 전기차 못지 않게, ‘전기차 충전’ 시장이 뜨겁다. 전기차를 마음 편하게 몰려면 충전 인프라 확충이 필수이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기에 지난해부터 LG, SK, 롯데, 현대자동차, GS 등 대기업 계열사들의 참전도 잇따르고 있다. ‘될 사업’의 냄새를 맡은 모습이다.

실제로 전기차 충전업은 매력적인 사업이 맞다. 주유소보다 진입 장벽은 낮으면서 아직 절대강자가 존재하지 않는 시장이자, 규모와 수요도 꾸준히 확대되는 중이다.

특히 일방향으로 주유하는 내연기관차와 달리 전기차는 충전 중 다양한 차량 및 사용자 데이터가 충전 사업자에게 공유된다. 이 같은 데이터는 가공하기에 따라 부가 서비스 개발이나 여타 사업과의 마케팅 연계로 짝지을 수 있으니 충전 수익 외에도 기업은 일석이조를 노릴 수 있다. 사업 형태도 충전기(하드웨어)만 만들거나, 충전기는 다른 제조사에서 구입 후 플랫폼(소프트웨어)만 운영하거나, 역량이 되면 둘 다 영위하는 방법 등 선택지가 다양하다.

대체로 대기업이 진입하는 시장은 대중의 주목도가 높아지며 투자 규모도 커진다. 경쟁이 심화되는 일종의 ‘메기효과’도 나타나게 된다. 대기업 참전의 긍정적인 영향이다. 반면 시장이 대기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는 부작용도 나타난다. 대기업의 브랜드 인지도, 서비스 노하우는 단기간에 기존 중소 경쟁사들을 따라잡기에 충분하다. 소비자들도 기왕이면 익숙하고 편리해 보이는 대기업 서비스를 선택한다. 당연한 일이다.

일전에 통신업계를 취재할 당시 알뜰폰 시장에서 비슷한 모습을 봤다. 국내 알뜰폰은 10여년 전 중소업체들이 처음 개척한 시장이다. 수년이 지나 정부의 용인 아래 대형 이통사들이 알뜰폰 자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시장은 빠르게 커졌지만 가입자는 이통3사 자회사로 쏠리는 현상이 가속됐다. 오죽하면 3사 자회사의 시장점유율 규제가 필요하단 얘기가 나왔을 정도다.

중소 알뜰폰 사업자들이 결국 시장을 내준 결정적 배경은 부족한 자본이었다. 가뜩이나 저렴한 요금제로 경쟁해 마진율이 낮은데, 자본이 풍부한 이통사가 들어와 현란한 마케팅, 보기 좋은 플랫폼, 서비스 투자로 경쟁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 결국 자체적인 생존 동력을 잃고 하나둘 이통사의 알뜰폰 플랫폼 생태계에 회사의 내일을 의탁하게 된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구도는 다시 되돌려지지 않을 것이다.

전기차 충전 시장에서도 비슷한 조짐이 관측되고 있다. 국내 충전 시장도 2010년 전후 아직 시장이 불모지일 때부터 일찍이 충전기, 충전 서비스 사업을 영위해 온 기업들이 있다. 그간 쌓은 기술과 노하우는 이제 빛을 발할 때다.

그러나 이들에게 대기업과의 경쟁은 큰 부담이다. 제품과 서비스 품질은 차치하고, 고객들은 벌써부터 “XX기업 것 쓰는 게 더 낫지 않겠냐”고 한다. 시장의 개화를 기다리며 오랫동안 보릿고개를 넘어온 중소 선도기업들에겐 힘 빠지는 일이다. 대기업과 홍보와 마케팅으로 경쟁하자니 당연히 자금 부담이 커지고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유는 줄어든다.

대기업들은 막강한 자본력으로 충전기 제조사를 인수해 단기에 기술력과 생산력을 확보하고, 기존 시장 내 서비스를 벤치마킹해 플랫폼을 만들어 경쟁 구도를 재편하고 있다. 대기업이 후발주자일 때 취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전략이다.

문제는 이들이 ‘국가 보조금’까지 욕심 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정부에선 전기차 충전 인프라 조기 성숙을 위해 충전기 제조사, 충전기 설치 및 서비스 사업자 등에게 일정 요건을 충족할 경우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 현재 다자간 경쟁이 치열한 가운데 이 보조금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는 기업의 사활을 건 문제가 된다. 보조금 없이 보조금 수혜 기업과 경쟁하려면 보조금만큼의 마진을 포기하고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은 다르다. 충전 사업이 ‘전부’인 중소업체들과 달리 대기업에 이는 여러 신사업 중 하나일 뿐이고, 큰 수익 없이도 사업 안정화까지 투자를 지속할 자금이 충분하다. 그럼에도 중소 경쟁사들과 당연한 듯 보조금 경쟁에 몰두한다. 심지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중소업체들 입장에선 대기업과 겨뤄볼 유일한 무기인 ‘가격 경쟁력’마저 희석된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이 장기화되면 충전 시장도 결국 대기업만 살아남는 곳으로 재편될 것이다. 남은 업체들이 ‘버티기’를 시전하더라도 결국은 사업체를 헐값에 팔거나 스스로 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안타까운 건 이 같은 문제에 대해 소비자들은 늘 ‘모르쇠’한다는 점이다. 그들에겐 누가 제품을 팔고 서비스를 제공하든 더 싸고 좋은 것을 주는 사업자가 ‘최고’일 뿐이다. 과정보단 결과만 두고 더 경쟁력 있는 기업이 살아남는 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대기업과 소비자 사이에 낀 중소업체가 하소연할 곳은 결국 정부와 언론뿐이다. 필요하다면 언론은 전하고, 정부는 다시 들여다 봐야 한다.

이미 충전 업계에선 대형 경쟁사들과 보조금 경쟁을 벌여야 하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 앓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온다. 시장논리상 대기업들이 보조금을 꼭 포기해야 할 이유도 없지만, 다들 그토록 부르짖는 ‘상생’을 실현하고 싶다면 ESG 보고서로 탄소 배출량 절감, 사회봉사활동만 자랑할 때가 아니다.

보조금은 중소업계가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한 마지막 보루다. 대기업의 체면으로 경쟁에 자신이 있다면 가격보다 품질과 서비스로 차별화하는 건 어떨까? 싼 것이 능사는 아니다. 이전에는 값싼 중국산이 여러 시장에서 우위를 점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비자들은 더 비싸도 고품질에 안정적인 서비스가 제공되는 국산을 찾기 시작한다. 휴대폰이나 TV, 각종 가전이 좋은 예다. 정부도 단순히 시장 진흥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진짜 보조금이 필요한 기업은 어디인지 면밀히 따져서 공정한 경쟁환경이 만들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건한 기자
sugyo@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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