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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금융지주 CEO들, 모순의 신년사

박기록 기자

[디지털데일리 박기록 기자] 국내 주요 금융기관장들이 매년 발표하는 신년사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새해를 맞이해 구성원들에게 건네는 덕담과 각오, 그리고 희망 사항들의 나열 그 어디쯤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KB, 농협, 신한, 우리, 하나금융 등 주요 금융지주사 회장들과 은행장들이 내보낸 2024년 신년사에선 예년과 비교해 파이팅 넘치는 공격적 워딩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은 아쉽다.

그나마 우리금융 임종룡 회장이 "증권사 인수 등에 나서겠다"고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사실 이것도 작년에 우리금융이 미처 해결하지못하고 이월시킨 숙제, 즉 '비은행 포트폴리오 확장' 과제일 뿐이다.

5대 금융그룹 CEO들은 한 목소리로 AI와 디지털을 강조했지만 예상했던 레토릭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국내 주요 금융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디지털기반의 플랫폼 경쟁력 강화, 내부혁신, 프로세스 혁신 등 제한적 모션뿐이다.

그리고 거의 약속이나 한 듯 올해 금융 CEO들은 신년사에 공통적으로 '리스크관리'와 'E.S.G'를 등장시켰다.

'리스크관리'는 말할 필요도없이 현재 금융권에 직면하고 있는 중차대한 현안이다.

지난주 태영건설 워크아웃 신청으로 촉발된 건설 'PF(프로젝트 파이낸싱) 뇌관'은 은행 및 2금융권 할 것이없이 금융권 전체를 급속하게 냉각시키고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리지 않았을때가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 지금이 그렇다.

더구나 현재 금융권이 직면하고 있는 리스크는 매우 복합적이란 점에서 사안의 중대성이 있다.

각종 국내외 거시경제지표의 불안으로 촉발된 시장(Market)리스크는 여전히 불확실성을 높이고 있으며, 개인 및 자영업자·소상공인 등 취약 거래 고객의 연체율증가로 인한 신용(Credit)리스크 역시 금융권의 긴장을 크게 고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금융회사 내부직원에 의한 횡령과 각종 불완전판매 논란, 전산장애 등 금융회사의 대외신뢰도를 급격하게 추락시키는 다양한 형태의 운영리스크 역시 중대 현안이다.

이처럼 한꺼번에 닥친 세가지 핵심 리스크에 대해 금융 CEO들은 과연 어느정도의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

신년사에 나타난 각오만으론 불안을 떨칠 수 없다.

한편 금융 CEO들은 'E.S.G'도 빼놓지 않고 강조했다.

사회적 공헌, 환경, 지배구조 선진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하는 E.S.G가 강조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동안 다소 한가하게 들린 워딩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E.S.G는 전혀 한가하게 들리지 않는다.

올해 금융권에서 의미하는 E.S.G는 강력한 '상생금융' 참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주 농협은행이 2148억원, 우리은행이 2758억원 규모의 민생금융지원 계획을 발표했고, 지방은행중에선 BNK금융그룹 계열의 부산은행이 525억원, 경남은행이 307억원을 확정했다.

이어 전날(2일)에는 신한은행이 3067억원을 발표했다. 이제 시장의 관심사는 KB국민은행과 하나은행의 발표 액수다. 과연 얼마를 내놓을 수 있을까.

소상공인 영세사업자 등에게 4% 이상 대출이자중 최대 300만원까지 환급(캐시백)해주는 것을 골자로하는 이같은 민생금융지원 방안은 결국 은행의 당기순이익을 기준으로 갹출하는 구조다.

자연히 상생금융에 따른 출혈로 해당 은행들이 속한 금융지주사의 실적 관리는 빡빡해질 수 밖에 없고, 재무건전성 관리 부담도 늘어난다. 또 배당금 감소 등 주주들에게 미치는 불이익도 불가피하다.

금융 당국은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재무건전성이 악화되지 않는 선에서 상생금융에 나설 것"이라며 시장을 안심시키고 있지만 이를 지켜보는 시장과 금융권의 표정은 결코 편안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것은 따로 있다.

과연 '상생금융'이란 이름으로, 또는 작년 실적이 좋았던 금융권의 자발적(?) 선의만으로 2024년 닥쳐올 파고들을 모두 넘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PF 부실화 뇌관, 홍콩H지수 추종 ELS 상품 대규모 부실화 우려 등 금융권을 직격할 만한 사안들이 올 상반기에 예고된 상태다.

일각에선 "그냥 시장 원리에 맡기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크게 터진다는 경고다. IMF 외환위기까지 소환할 필요도 없다.

대손충당금 강화 등을 통해 혹독한 리스크에 대응해야하는 은행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작년 아무리 많은 실적을 냈더라도 현재 제코가 석자인 상황이다.

따라서 수백~수천억원씩 '상생금융'의 이름으로, 또 ESG의 이름으로 나서는 모습은 사실 '모순'(矛盾)에 가깝다.

냉정하게 말하면, 올해 주요 금융그룹 CEO들의 신년사는 이러한 모순이 미사여구로 녹여져있는 것이다.

신한금융 진옥동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내부통제와 리스크관리 강화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업(業)의 윤리'를 특별히 강조했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결국 우리 금융권 전체가 '업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우리 금융산업은 시장에 신뢰를 주고 있는가'

박기록 기자
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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