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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40년] ③ 한국이동통신 새출발…독립을 향한 열망

바르셀로나(스페인)=김문기 기자

전세계 내노라 하는 이동통신사들이 총출동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바일월드콩글레스(MWC)에서 올해도 SK텔레콤은 메인홀 중심에서 우리나라 정보통신기술(ICT)을 글로벌에 전파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0주년을 맞이한 SK텔레콤은 국내 1위 이통사를 넘어, AI 컴퍼니로 또 다른 패러다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과거 40년을 조망해보고 미래 ICT 개척자로서 SK텔레콤의 비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김문기 기자]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독립적 지위를 얻었던 때가 바로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개최된 시기였다. 88서울올림픽은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자체적 기술력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중요한 무대였다. 그리고 그 순간은 한국이동통신서비스도 신규 서비스 론칭에 만전을 기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5월 13일 사명을 변경했다. ‘한국이동통신’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이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이동통신서비스’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우리나라 휴대폰 도입의 첫 시작점이기도 하다.

물론 유선과 달리 무선은 한계가 컸다. 휴대용 무전기의 경우 전파를 붙잡아 보다 멀리 중계해 줄 시설이 필요했다. 중계기와 기지국이 턱 없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단말 전파 도달거리는 10~30Km 수준, 고속도로의 경우 중계시설이 20~60Km가량 벌어져 있었다. 전국망은 커녕 도시 하나도 제대로 커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그러던 와중에 열린 88서울올림픽의 가뭄 속 단비였다. 무선 커버리지 확장에 대한 당위성을 충분히 제시해 줬기 때문. 이동통신 사업 추진에 날개가 달린 셈이었다.

한국이동통신은 이동통신 서비스 도입을 위해 체신부에 휴대용 전화 설치 및 요금안을 제출했다. 체신부도 6월 7일 이 안건을 최종 승인하면서 이를 도왔다. 남은 숙제는 얼마나 많은 고객을 유치할 수 있는가로 귀결됐다.

이에 따라 대대적 홍보에 돌입했다. 매체를 활용해 이동통신 서비스를 알리는데 최선을 다했다.

‘저희 회사는 88년 6월 1일 정부로부터 공중전기통신사업자(이동체통신분야)로 지정받아 상호를 한국이동통신서비스에서 한국이동통신으로 변경, 차량전화와 무선호출 사업을 하고 있으며, 수도권 무선호출 서비스 지역도 88년 7월 1일부터 수원, 성남, 안양 지역으로 확대했다’

당시 지면에 할애한 홍보 포스터의 한 문구다. 이동통신 서비스에 대해서는 ‘휴대하기 간편한 이동가입전화로서 차량전화망을 이용해 국내외 일반가입자, 차량전화 가입자, 휴대용 전화 가입자, 상호 간에 착발신 통화가 가능한 편리한 전화’라 정의했다.

커버리지는 최초 서울과 수원, 성남, 안양, 안산시 등 수도권 중심으로 형성됐다. 같은 해 9월부터 부산과 마산, 창원, 진해, 김해 개통을 예고했다.


새로운 시작, 이동통신 시대 개막

1988년 7월 1일 드디어, 청약 접수가 시작됐다. 청약제한은 딱히 없었으나 커버리지를 고려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조건이었다. 전화가입청약서와 무선국 허가 신청서, 신원 증명서를 갖춰 서울 서초구 방배동 서초전화국 옆 건물인 한국이동통신 서울지사로 와야 했다.

설치비는 65만 원, 해지 시 반환됐다. 장치비는 1만 원, 무선국허가신청료는 1만 2천 원, 무선국 준공검사료 2만 4천400원이다. 요금제는 기본료 월 2만 7천 원, 도수료 서비스 지역 10초당 25원이 설정됐다. 시외구간은 일반전화 DDD 요금과 동일했다. 전화기는 별도 구입해야 했다.6)

나름의 한계는 있었다. ‘차량전화보다 소출력으로 저지대나 기지국에서 원거리에서는 통화 불량일 수 있습니다’라는 솔직 담백한 고백이 실려 있다. 물리적으로도 대형 안테나를 달고 있는 차량과 그보다 작은 안테나를 갖춘 휴대용 전화기의 전송품질을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청약 접수가 시작됐으나 단말은 한진전자 제품 1대뿐이었다. 한진전자는 영국 테크노폰의 제품을 수입해 판매했다. 수입시판가격은 280만 9천400원. 폭 7.5cm, 두께 3Cm, 길이 18.5Cm, 무게 530g으로 국내 형식검증을 받아 정식 도입됐다.

이후 1G를 대표하는 휴대전화 서비스는 1989년 전국 2만 3천여 회선을 증설하면서 35 개시와 경부와 호남, 중부, 구미 등 4개 주요 고속도로로 반경을 넓혔다. 1993년까지 71만 7천500회선이 설치되면서 전국 74 개시와 107개 읍면 및 주요 고속도로 주변 지역까지 확장됐다.


독립을 향한 열망

한국이동통신이 독립 경영을 시작으로 신규 이동통신 서비스를 내놓기는 했으나 그에 따른 투자비용 역시 만만치 않게 필요했다. 자생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외부 투자가 필요했으나, 한국이동통신 자체가 한국전기통사의 100% 출자회사였기에 본원적 한계가 자명했다.

체신부는 1989년 5월 1일 한국이동통신 경쟁력 강화를 목적으로 ‘자율경영을 위한 기반조성계획’과 시행을 목적으로 한 ‘이동통신서비스 발전계획’을 시달했다. 주요 내용은 중 눈에 띄는 항목은 민간자본 참여 확대와 기업공개 추진이다. 자율성 강화를 위한 당연한 대안이었으나, 문제는 정부재투자기관이 기업공개에 나선 사례가 없었고, 또 기업공개 없이 민간 투자를 이끌어낼 수 없다는데 있었다.

물론 이같은 문제점과 달리 시장의 관심은 뜨거웠다. 정부재투자기관의 기업공개에 대해 시장은 정부의 육성의지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정부가 밀어주니 안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결과적으로 11월 9일 한국증권거래소 상정 요건 심사를 통해 정식 상장됐다. 또 12만 8124명의 새로운 주주가 탄생하면서 한국전기통사 단독 주주에서 벗어났다. 시간이 갈수록 주가는 상승곡선을 그렸다.

사업도 나날이 확장됐다. 정보통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100만 가입자 달성 시기인 1991년 말 이동전화 가입자는 11만 6천198건, 무선호출 가입자는 85만 515건으로 101만 8천704건을 유치했다. 100만 가입자 시대를 연 이동통신 시장은 이후 더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그중에서도 이동전화의 성장이 눈에 띄었다. 무려 2 배수에 달하는 가입자 증가폭을 보였다. 1991년 10만 가입자 수준이었던 이동전화는 1993년 말 50만 고지에 올랐다.

그렇다고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늘어가는 가입자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인프라 역시 확장돼야 했다. 적체 현상이 발생하기 전에 이를 사전에 감당할 수 있게 설계해야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동전화 시설장비를 전담하는 전용비행기까지 운항됐다. 한국이동통신은 대한항공, 대한통운과 함께 이동전화 장비운송전담팀을 구성해 운용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고객 서비스 응대도 숙제로 지적됐다. 1992년 1월 31일 무선호출위탁대리점 개설 시범안을 마련하고 경기도 안산시에 최초 위탁대리점 개설 공고를 냈다. 5월에는 실제 안산대리점이 문을 열었다. 7월부터 부산 북구와 공주시, 수도권, 부산권, 충청권 등에 69개 대리점 개설이 연달아 이어졌다. 이후 한차례 더 대리점을 모집한 한국이동통신은 연말까지 총 113개의 대리점을 개설할 수 있게 됐다. 1994년 2월에는 178개점으로 더 늘었다.

구의동 전신국에 세간살이와 천막시설을 갖췄던 한국이동통신은 어느덧, 178개의 지점을 운영하는 강소기업으로 발전한 셈이다.

바르셀로나(스페인)=김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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