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최근 국내외 배터리 제조사가 잇달아 유럽과 미국에 공장을 구축하고 있다. 고객사인 글로벌 완성차업체와 근거리에서 협업하기 위함이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국이 ‘허브 국가’로 떠오르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존재 때문이다. 일본 소재·부품·장비 업체는 두 회사와의 밀접한 관계 유지를 위해 줄줄이 한국행을 결정하는 분위기다. 일본 수출규제 이후 이러한 현상은 두드러지고 있다.
17일 일본 호리바그룹은 한국 강화 전략을 발표했다. 국내 법인 호리바에스텍코리아가 오는 6월부터 질량유량 제어기기(MFC) 하이엔드 모델 ‘D500’ 시리즈를 생산하는 것이 골자다.
MFC는 반도체 증착 및 식각 공정에서 가스 공급의 정밀 제어 역할을 하는 제품이다. 호리바그룹은 관련 시장점유율 60% 내외를 차지하는 업체다. 회사 관계자는 “한국이 주요 거점이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고객 맞춤형 대응을 위해 이번 결정을 내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 반도체 기업이 한국 법인 강화 또는 신공장 설립하는 사례는 처음이 아니다. 당초 한국과 일본은 지리상으로 멀지 않기 때문에 현지에서도 국내 업체 수요 대응이 가능했다. 법인을 세우더라도 주요 연구개발(R&D) 및 생산시설은 자국에 뒀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일본 수출규제를 기점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산화 비중을 높이면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서 수입한 불화수소는 938만달러(약 105억원) 수준이다. 전년(3633만달러)대비 74.2% 급감했다. 전체 불화수소 수입량 중 일본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32.2%에서 12.8%로 낮아졌다. 일본 정부가 불화수소를 제재 품목에 올리면서 공급망 다변화에 나선 결과다. 국내에서는 SK머티리얼즈 솔브레인 램테크놀러지 등이 수혜를 입었다.
이는 일본 기업의 실적 하락으로 이어졌고 결과적으로는 자국 정부의 정책이 발목을 잡게된 셈이다. 최근 일본 닛케이신문은 “한국의 반도체 소재 국산화로 일본 기업이 타격을 입었다”며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현지 기업이 택한 승부수는 한국행이다. ▲반도체 웨이퍼 연마 소재 납품하는 쇼와덴코 ▲고유전재료를 생산하는 아데카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 공급하는 도쿄오카공업 ▲특수가스 황화카르보닐을 만드는 간토덴카공업 ▲반도체 장치용 석용 유리 제조하는 토소 등이 주요 제품 생산이나 개발을 국내에서 수행하기로 했다.
이들은 호리바와 마찬가지로 각 분야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업체들이다. 그럼에도 대형 고객사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있는 한국을 ‘특별관리’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과 SK는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이다. 일본 수출규제 여부를 떠나서 대형 고객사라는 뜻이다. 일본 기업이 이들을 붙잡기 위해 한국으로 향하는 일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면서 “삼성과 SK 입장에서도 당장 전 분야에서 자립화가 어려운 상황에서 기술력을 갖춘 일본 업체가 찾아오는 것은 긍정적”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