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영 칼럼

[취재수첩] 오컴의 면도날 법칙

권하영

[디지털데일리 권하영 기자]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실에 가깝다.” 14세기 영국 논리학자 윌리엄 오컴이 설파한 이론이다. 한정된 정보로 어떤 사안에 대해 진실을 가릴 때 불필요한 가정은 면도날로 도려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래서 ‘오컴의 면도날 법칙’이라고 불린다. 복잡할수록 거짓이고, 단순할수록 진실이라는 얘기다.

넷플릭스와 SK브로드밴드간 망 이용대가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넷플릭스는 SK브로드밴드를 상대로 망 이용대가를 낼 의무가 없다며 채무부존재 확인소송을 제기했고, 지난 1심에서 패소해 항소했다. SK브로드밴드 측은 지난 18일 열린 항소심 2차 변론에서 이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들었다. ‘망을 이용했으니 대가를 내라’는 단순한 명제가 넷플릭스의 갖은 해명 때문에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넷플릭스는 지난 1심에서 최근 항소심 변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리를 들어 망 이용대가를 부정했다. 일단 1심에선 ‘접속료’와 ‘전송료’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기존 인터넷 업계에선 존재하지 않은 개념이었다. 넷플릭스 미국 본사로부터 전세계 각지에 구축한 캐시서버(OCA)까진 접속구간, 그리고 캐시서버로부터 최종 이용자까진 전송구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는 접속구간은 OCA를 통해 해결했고, 전송구간은 SK브로드밴드 같은 인터넷제공사업자(ISP·통신사)의 의무이므로 전송료, 즉 망 이용대가를 내지 않아도 된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이 논리는 1심에서 패배했다.

그러자 넷플릭스는 항소심 1차 변론에서 ‘상호무정산(빌앤킵·Bill and Keep)’ 원칙을 가져왔다. 상호무정산이란 서로 직접적인 대가를 주고받지 않아도 사실상 정산을 한 것으로 인정하는, 쉽게 말해 ‘퉁칠 수 있다’는 의미다. 넷플릭스는 자체 개발한 콘텐츠전송네트워크(CDN) 기술이 적용된 캐시서버인 OCA를 전 세계에 구축했는데, 이 OCA로 망 이용대가를 ‘퉁치자’는 얘기다. 하지만 인터넷 생태계에서 상호무정산 원칙은 통상 ISP와 ISP간 관계에만 적용된다. 콘텐츠제공사업자(CP)인 넷플릭스는 SK브로드밴드와 상호무정산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게 SK브로드밴드의 반박이었다.

논리가 막히자 이번에는 ‘송신 ISP’와 ‘착신 ISP’라는 개념을 또 만들어냈다. ISP는 CP와 연결된 송신 ISP 그리고 최종 이용자와 연결된 착신 ISP로 나뉘는데, 넷플릭스는 OCA라는 연결수단이 있으므로 송신 ISP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 주장대로라면 OCA는 일종의 통신망이며 따라서 넷플릭스는 통신망을 가진 통신사라는 해괴한 결론이 나온다. 물론 OCA는 인터넷 트래픽을 일부 줄여줄 수 있으며 이는 SK브로드밴드도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OCA는 어디까지나 CDN 기술일 뿐 통신망은 아니다. 넷플릭스는 CP이지 ISP가 아니라는 것도 상식적으로 누구나 알 것이다.

SK브로드밴드는 넷플릭스와의 망 이용대가 분쟁에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망 이용대가를 내지 않아도 된다는 넷플릭스의 주장은 접속료·전송료 개념부터 상호무정산 원칙, 송신 ISP와 착신 ISP의 구분 등 복잡한 인과관계를 거쳐야 하는 반면 SK브로드밴드는 망을 썼다면 돈을 내자는 단순한 결론을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만큼 최종 판단은 결국 법원이 해야 할 몫이다. 하지만 넷플릭스의 주장들을 보면 어쩐지 오컴의 면도날 법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리저리 꼬이고 꼬인 논리들보다는 간결하게 핵심을 짚고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다. 다음 항소심 3차 변론은 6월15일로 예정돼 있다. 넷플릭스의 설득력 있는 주장을 기대해본다.
권하영
kwonhy@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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