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혁신 잡는 사전규제] ① 두려움에 떠는 K-혁신…꽃 피기 전 멍든다

왕진화 기자

한국의 ‘혁신’ 속도는 눈부시게 빨랐다. 더욱 쉽고, 간편하고, 빠르게 이뤄지길 원하는 고객이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정보기술(IT)·플랫폼·게임 기업들이 눈치 보지 않고 고객 편익 향상을 위한 아이디어를 뽐내왔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자율규제’가 우선이었던 윤석열 정부 기조가 정반대로 움직이려는 모습이 관측되면서부터 이들 기업은 두려움에 떨고 있다. 신년이 밝아오면서 그 그림자는 더욱 선명해졌다. 해외 기업은 그 사이를 보란 듯 파고들며 국내 시장 잠식 속도를 올리고 있다. 한국산 혁신, 올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까. <편집자 주>

경기 판교테크노벨리. [ⓒ성남시]
경기 판교테크노벨리. [ⓒ성남시]

[디지털데일리 왕진화 기자] K-혁신이 위기에 처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지 못한 채 국내 ‘소수 핵심 플랫폼’을 대상으로 사전 규제를 준비하고 있어서다. 소수 핵심 플랫폼을 정의하는 기준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스타트업부터 중견기업, 해외 전문가 및 기관과 일부 소비자들까지 우려를 표하는 형국이다. 벤처투자사들마저 “더 이상 제2의 네이버, 쿠팡은 보기 힘들어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네이버와 카카오, 쿠팡 등 소수 핵심 플랫폼으로 지목될 혁신 주자들은 오히려 침묵을 유지한 채 조용히 이를 대비하는 모습이다.

국민의 일상은 검색과 커뮤니케이션, 배달, 게임 플레이까지 플랫폼 전반과 밀접해 있다. 이러한 가운데 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 등 규제당국은 각각 국내 정보기술(IT)·플랫폼·게임 기업들을 겨눈 사전 규제를 추진하거나, 곧 실행할 방침이다. 그 시작과 끝은 언제였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각 분야별로 지켜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지난 2021년 11월29일 국회 앞에서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등 주최로 열린 ‘온플법 처리 불발 국회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처리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21년 11월29일 국회 앞에서 민변 민생경제위원회 등 주최로 열린 ‘온플법 처리 불발 국회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 처리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시작은 ‘온플법’…팬데믹에 영향력 확대되며 규제 필요성 목소리 높아져=온라인 플랫폼 규제가 필요하다는 기조는 지난 문재인 정부 시절 처음으로 등장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비대면 소비가 증가하면서, 온라인 플랫폼 영향력이 급속도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곳곳에선 온라인 플랫폼이 소상공인 및 입점 업체 등을 대상으로, 우월적 지위 남용을 우려했다.

공정위는 지난 2020년 5월, 이같은 우려를 반영해 플랫폼 갑을관계의 거래 공정화를 위한 ‘온라인플랫폼공정화법’(이하 온플법) 입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플랫폼 산업 특수성을 반영한 거래상 지위 남용행위 기준 구체화 및 보복 조치 금지가 골자다. 또한, 거래조건 사전 공개를 법제화해 투명성을 제고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IT 업계와 중소상공인 및 입점 업체 간 입장은 첨예하게 갈렸다. IT 업계는 자율규제만으로 충분하며, 건강한 디지털 생태계 조성을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중소상공인은 정확히 반대였다. IT 업계가 실시하는 자율규제를 믿을 수 없고, 언제든 ‘갑질’을 할 수도 있기에 온플법 도입을 찬성하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실제로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019년 실시한 ‘온라인 플랫폼 입점업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오픈마켓 입점업체의 98.8%, 배달앱 입점업체의 68.4%가 공정위 온플법 제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온플법 자체가 거래불공정 행위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뜻에서였다.

온플법은 지난 2022년, 윤 정부가 출범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게 된 것. 특히, 윤 정부는 출범 전부터 플랫폼 기업의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에 대한 견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필요 시 최소 규제’를 원칙으로 자율적 상생안을 도출하는 방식을 규제의 큰 틀로 삼겠다는 입장을 밝혀 IT 업계 환호를 받기도 했다.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백운섭 회장이 8일 오전 공정거래위원회에 '플랫폼 경쟁 촉진법'이 중소상공인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내용의 반대 입장문을 제출했다. [ⓒ 한국플랫폼입점사업협회]
한국플랫폼입점사업자협회 백운섭 회장이 8일 오전 공정거래위원회에 '플랫폼 경쟁 촉진법'이 중소상공인의 생존을 위협한다는 내용의 반대 입장문을 제출했다. [ⓒ 한국플랫폼입점사업협회]

◆순식간에 바뀐 윤 정부 기조…‘필요 시 최소 규제’에서 ‘사전규제’로=그러나 윤 정부 기조는 약 2년여 만에 정반대로 바뀌었다. 돌연 공정위가 지난해 12월 국무회의 보고를 통해 ‘플랫폼 공정경쟁 촉진법(가칭, 이하 플랫폼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면서다.

플랫폼법엔 소수 핵심 플랫폼을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로 지정하고, 이들 사업자에 자사 우대와 멀티호밍 제한(자사 플랫폼 이용자에 경쟁 플랫폼 이용을 금지하는 행위) 등 플랫폼 시장 반칙 행위들을 금지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공정위는 지배적 플랫폼 사업자 지정 시엔 매출액·이용자 수·시장점유율 등 정량 요건에 더해 해당 플랫폼 시장 진입 장벽과 시장 내 영향력 등 정성 요건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할 계획이다. 조만간 공정위는 관계부처 및 당정협의, 업계 의견 청취 등을 거쳐 플랫폼법 지정 기준과 제재 수위 등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한국인터넷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한국온라인쇼핑협회 등이 속한 디지털경제연합을 비롯, IT 업계 전반은 “사실상 국내 기업들에게 사약을 내리는 꼴”이라며 강력 반발했다. 플랫폼 입점업체 및 일부 소비자 단체도 각각 해외 플랫폼의 수수료 상승 및 편취, 국내 기업 위축 영향으로 편의·혜택 축소 등에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공정위는 지난 9일 예정돼 있던 디지털경제연합(이하 디경연)과의 면담도 무산시켰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디경연은 공정위 측에 현재 추진 중인 안을 대략적으로라도 검토한 뒤 면담을 갖고 싶다고 요청했다. 이에 공정위 측은 해당 요청을 내부적으로 판단해보고 알려주겠다고 답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공정위는 면담 예정일이었던 지난 9일까지 회신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공정위는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중소기업중앙회·한국중견기업연합회·한국무역협회·대한상공회의소·한국경제인협회·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을 순차적으로 방문하며 플랫폼법 제정 취지와 내용, 필요성을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질적 이해 당사자인 IT 업계 전반은 공정위의 이러한 예측 불가 행보에 더욱 우려를 표하고 있다.

[ⓒ 넥슨]
[ⓒ 넥슨]

◆게임 업계 ‘확률형 아이템 확률 공개’ 목전…사전 규제 초읽기=한편, 게임 업계는 사전 규제 시행을 눈앞에 두고 있다. 오는 3월22일부터 게임 아이템 획득 확률 공시 의무화를 골자로 하는 ‘게임산업법 개정안’이 시행될 예정이다.

게임 업계는 공정위가 주도했던 앞선 사례와는 달리, 게임 이용자와 국회가 합심하면서 개정안을 통과시켰기에 결이 매우 다르다. 게임 업계는 해당 개정안 본회의 통과 당시,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였다. 이미 대부분 국내 게임업계는 해외 게임사와 달리, 자율규제를 준수하며 확률을 공개해 왔고 이를 대비하기도 하면서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최근 공정위는 넥슨에게 역대급 철퇴를 때렸다. ‘메이플스토리’와 ‘버블파이터’를 운영하는 넥슨이 게임에서 판매하는 확률형 아이템 확률을 이용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고도 제대로 공지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공정위는 넥슨이 소비자 선택 결정에 중요한 정보인 확률 관련 사항들을 누락하거나 거짓으로 알리는 기만적인 방법으로 소비자 구매를 유도해 전자상거래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모든 국내 게임사는 이미 확률형 아이템이라는 핵심 수익모델을 버리고 ‘게임 패스’ 등을 속속 도입하며 재미와 혁신을 위주로 게임을 개발 중이지만, 개정안 시행을 앞둔 상황인 만큼 넥슨의 역대급 철퇴를 본 국내 게임업계는 남일 같지 않게 느낀 모습이다. 게임업계가 지난해 한두곳을 제외하곤 모두 어려움을 겪었었기에 전반적으로 더욱 위축된 듯 하다.

비록 게임업계는 IT 업계와 사전 규제로부터 오는 고민의 결이 많이 다르지만, 전망되는 미래는 두 업계 모두 똑같다. 바로 해외 기업의 공습이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비교적 국내법에서 자유로운 해외 게임사들의 공세가 끊임없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왕진화 기자
wjh9080@ddaily.co.kr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디지털데일리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