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취재수첩] 전기차·배터리, 캐즘 후가 더 어렵다…협력의 장 마련돼야

고성현 기자
기아 EV3 [ⓒ현대자동차그룹]
기아 EV3 [ⓒ현대자동차그룹]

[디지털데일리 고성현기자] "본격적인 전기차 시대가 오면 중국이 차량, 배터리에서 모두 앞서나갈 겁니다. 비야디(BYD)가 이미 전기차 시장에서 기틀을 마련했고, 배터리 분야에서도 중국의 영향력은 더욱 커지고 있어요. 국내 배터리 업체들도 중국산 소재·장비를 이전보다 심도 있게 검토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최근 국내 배터리 업계는 셀, 소재, 장비 등 너나할 것 없이 곡소리를 내고 있다. 저조한 하이니켈 배터리의 출하와 위축된 투자로 당장의 매출은 물론 내년 매출 걱정까지 해야하는 상황이어서다. 일부에서는 현 시장이 일시적 수요 정체기(Chasm)에 불과하다는 긍정적인 목소리도 존재한다. 다만 캐즘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뜯어보다 보면, 결국 국내 배터리 업계가 치러야 할 출혈 경쟁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만다.

전기차 시장의 부진은 캐즘이라는 용어보다도 훨씬 복잡한 배경이 얽혀 있다. 탄소중립을 위한 주요국 정책으로부터 시작된 시장인 터라 책정된 보조금 예산 규모, 주행거리 및 충전속도와 같은 배터리 전기차(BEV)의 경제성 등 소비자의 구매 요인이 시시각각 바뀌고 있다.

전기차를 비롯해 인공지능(AI)과 같은 첨단 산업이 발전하면서 전력 사용량이 급격하게 늘어난 점도 숙제다. 전력으로 활용할 에너지 발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부족한 인프라 구축은 어떻게 전력을 끌어와 활용할 것인지 등 숙제가 여럿 남아 있다. 전기차를 위시한 생태계 곳곳이 넓혀져야만 본격적인 시장 성장의 활로를 찾을 수 있는 셈이다. 이는 전기차 OEM, 배터리 셀, 소재·부품·장비·인프라로 나뉘어진 개별 기업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모든 전기차 생태계를 주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국가는 전세계에서 단 한 곳밖에 없다. 바로 중국이다. 막대한 인적·금전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 위험성이 높은 정책을 과감하게 실현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덕이다. 거대 내수 시장을 일종의 테스트베드(Test bed)로 활용한 후 수출로 연계하는 전략은 타 권역 국가 및 기업에게는 불합리한 수준으로 느낄 정도다. 이는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자국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각종 견제 법안, 관세 조치를 내놓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업은 미국과 유럽보다도 중국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 생산 기지로 중국 내 부지를 활용하는 것부터 시작해 소재, 부품, 장비에 이르는 영역에 중국 기업의 손길이 뻗친다. 시장 부진에 따라 원가절감이 우선 목표가 되자, 일부 국내 기업은 중국 소재와 장비를 적극 활용하기 위한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 기업 관계자는 "중국의 배터리 하위 생태계에 있는 기업들이 해외 기업과의 합작, 자체적인 설비 구축으로 높은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했다. 특히 배터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측면의 아이디어가 좋아 이를 검토하는 기업도 매우 늘어난 추세"라며 "배터리 셀 측면에서도 중국이 하지 않을 뿐, 하이니켈을 하겠다고 마음 먹으면 격차가 크게 좁혀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완제품인 전기차로 그 범위를 넓히면 위기의 신호가 더욱 크게 잡힌다. BYD의 무서운 공세 때문이다. BYD는 내수 시장에서 쌓은 전기차 노하우를 바탕으로 글로벌 전역에 진출해 있으며, 각종 관세 부과·제한 정책 등을 뚫고 시장 장악의 토대를 마련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상업용 전기차 리스 시장이다. 유럽, 미국 등 주요국에 250개 이상의 대리점을 구축하고 전세계 리스용 전기차 입찰마다 참여하며 영역을 넓히고 있다. 값싼 초기 구매 비용, 가격 대비 높은 성능 평가, 오랜 기간 쌓아 온 A/S 노하우 등이 경쟁력으로 꼽힌다.

BYD는 한국 시장으로의 진출도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승용차 모델 '돌핀', '씰' 초기 물량을 들여오고 관련 인증 절차를 밟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내 전기차 시장은 패스트 팔로워(Fast Follower) 전략을 펼쳐 온 현대자동차·기아의 위상이 굳건한 데다 중국산 제품에 대한 이미지 등이 진입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저가, 저품질에 대한 이미지를 지우지 못하면 국내 시장 경쟁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BYD의 한국 시장 공략 포인트는 오롯이 중국산 제품에 대한 편견을 지우는 것밖에 없는 것이다.

비야디(BYD) 전기차 '돌핀' [ⓒBYD]
비야디(BYD) 전기차 '돌핀' [ⓒBYD]

상황은 명백한 위기인데 배터리 업계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캐즘이 끝나면 다시 시장이 성장할 것이고, 그러면 국내 업체들의 성장성도 이어질 수 있다'라는 것. 중국 기업의 위협에 따른 위기가 있지 않냐는 지적에 대한 대응도 이와 유사하다. 혹자는 "중국 편을 들어주는 것 아니냐"라거나 "국내 기업 죽으라는 소리 말고, 발전을 위한 응원의 목소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맞는 이야기다. 국내 배터리 기업이 위기에 처한 만큼, 언론도 핵심 산업의 발전을 도울 수 있도록 이들의 목소리를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핵심적인 산업 내 위기 요인을 짚고, 이에 대한 대응 방안의 목소리를 청취하는 것 역시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이다.

전기차 시장은 전세계적인 산업 재편과 경제 블록화, 전력 및 에너지 수요 양상에 따라 국가전으로 변모하고 있다. 주요국에 맞서 우리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 간 이해 관계를 우선시하기보다 협력과 상생을 통한 신규 아이디어의 도출이 우선시돼야 한다. 하위 생태계의 마진 압박을 부추기는 적자생존의 생태계가 아닌, 동반 성장과 시장 주도권 확보를 위한 공생하는 생태계 조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미 국내 산업은 LCD 디스플레이 시장에서 중국발 위기를 겪어 온 바 있다. 이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국가핵심기술을 지키고 키우는 정부의 역할이 커져야 함은 물론, 다양한 기술이 파생할 수 있는 논의의 장이 조성돼야 한다. 환경이 만들어지고 국내 기업이 시장을 리딩할 기술을 갖추게 된다면 성장 동력은 다시금 키울 수 있다. 생태계 내 갑을 관계가 우리 산업을 '을'로 만들 수 있는 위기가 도래한 만큼, 돌파구를 마련할 공동의 협력이 등장하기를 기대한다.

고성현 기자
naretss@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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