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취재수첩] '오늘도 일정 밀렸어요'…한숨 늘어 난 배터리 업계

고성현 기자
얼티엄셀즈 3공장 전경. 본문과는 관계 없음 [ⓒ얼티엄셀즈]
얼티엄셀즈 3공장 전경. 본문과는 관계 없음 [ⓒ얼티엄셀즈]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다음주에 서명키로 했던 발주계약은 막상 다가오면 연기되기 일쑤고, 기대했던 셀 고객사의 투자 일정도 차일피일 밀리고 있어요. 안 그래도 낮은 마진율에 하락의 불씨를 붙이고 있네요."

2023년 말 시작된 캐즘이 올해로 2년차에 접어들면서 배터리 업계의 시름도 늘어가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가 나란히 적자로 돌아서면서 투자를 위한 곳간을 닫았고, 정책적 리스크도 사라지지 않으며 당장 앞날을 예단할 수 없게 된 탓이다.

특히 배터리 3사의 투자 일정에 맞춰 올해 경영계획을 세웠던 소재·부품·장비 업계는 타격이 적지 않다. 올해 납기하기로 했던 물량이 제때 매출로 인식될지도 불확실하고, 올해 예정됐던 프로젝트들이 시행될지조차 알 수 없어졌다. 실제로 올해로 예정됐던 LG에너지솔루션-스텔란티스 합작법인(JV) 투자가 3년 뒤로 연기되면서 이들 협력사는 빨간불이 켜졌고, 상대적으로 버틸만 하던 삼성SDI의 협력사들도 울상을 짓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장비 업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핵심 협력사들의 고객 다각화 전략은 업체들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면 중 하나다. 기존에는 핵심 고객사로부터 오는 수주가 확실했다 보니 타 고객사로 넓힐 필요가 없었지만, 원 고객으로부터 수주가 끊기자 울며 겨자먹기로 외연 확장에 나선 것이다. SK온의 핵심 협력사인 우원기술이 삼성SDI로 발판을 넓히고, 엠플러스가 LG에너지솔루션 등으로 마케팅을 확대하는 것은 이를 방증하는 대표적 사례다.

이는 장비 분야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양극재 등 주요 핵심 소재 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시장에 가뭄이 들자 단 한 건의 프로젝트에 대한 업체 간 경쟁도 보다 치열해졌고, 수주라도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저가 입찰에 나서는 등 출혈 경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원료 안정화 목적으로 확보해뒀던 장기 계약 기반 리튬, 니켈 등은 오히려 재고자산평가손실로 반영돼 이들의 재무적 위기만 부각시키는 중이다.

원래라면 이들 경쟁에 미소를 지었을 배터리 셀 제조사들도 협력사 이탈 우려, 자동차 고객사의 공급망관리(SCM) 주도권 침탈 등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에 대한 불안 요소가 여전한 상황에서 추가 마진을 확보할 요인마저 사라지다 보니, 캐즘이 끝나더라도 적자를 면할 수 있을지가 불안한 것이다. 중국과의 경쟁은 물론 자동차 업체와 정책적 리스크까지 떠안고 있어 반전을 위한 기회의 문도 좁아지고 있다. 말 그대로 국내 업계 간의 적자 생존, 승자 독식의 시장이 찾아온 셈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 내부에서는 더 이상 배터리 산업이 기업만 부담을 떠안아서는 안된다는 불만의 목소리도 터져나온다. 배터리 역시 첨단전략산업 중 하나인 만큼, 설비투자에 대한 보조금 지원이나 타국 정책 리스크에 대비할만한 정책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한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의 중요성은 전기차 시장은 물론, 인공지능(AI) 기반 데이터센터 확대에 따라 더욱 높아지고 있지만 이들의 안정적 사업 기반은 더욱 위축되고 있다"며 "배터리 업계가 합심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든지, 직접 지원이 됐든 대책이 나와야만 중국으로부터의 잠식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인선 차관(사진 왼쪽)이 포스코퓨처엠 관계자로부터 이차전지 핵심소재인 음극재 제조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는 모습 [ⓒ포스코퓨처엠]
강인선 차관(사진 왼쪽)이 포스코퓨처엠 관계자로부터 이차전지 핵심소재인 음극재 제조 공정에 대한 설명을 듣는 모습 [ⓒ포스코퓨처엠]

이들의 절실한 목소리에 응답하듯 한국배터리산업협회의 움직임도 점차 기민해지고 있다. '인터배터리 2025'를 통해 타국과의 교류와 접점을 좀 더 확대하는 한편, 정부 대상의 협상 루트를 여러 갈래로 마련하면서 목소리를 높일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확실한 정부의 반응과 지원이다. 정쟁을 위한 소모적 논의가 아닌 건설적이고, 보다 실질적인 지원 대책을 논해야 한다. 배터리 산업 확대를 위한 '골든 타임'은 이미 수 차례 지나가버렸어도,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한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다.

첨단 산업의 정부 지원을 논할 때마다 언급되는 사례가 있다. 국내 기업이 한 때 시장을 장악했던 디스플레이 산업, 그리고 2018년 화재 사태로 멈췄던 국내 에너지저장장치(ESS) 산업 쇠락이 바로 그렇다. 두 사례 모두 미진한 정부 지원 혹은 철창 같은 규제 확대에 밀려 부진하고, 결국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겨 글로벌 입지를 내준 이력이 있다.

정쟁과 수 싸움은 정책을 통과시킨 세력의 힘을 실어줄 지는 몰라도, 경제를 책임지는 밑바탕의 몸집을 키워줄 수는 없다. 정부와 국회가 이제는 불필요한 조항에 대한 근시안적 논쟁은 이제 멈추고, 국가 핵심 산업들이 먼 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길을 놓는 것에 힘을 써주기를 기대한다.

고성현 기자
naretss@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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