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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혁신의 연속… TV 개척자 삼성전자의 1등 스토리

한주엽 기자

- [ICT 격동의 시대, 삼성전자만 승승장구하는 까닭은?②]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처음 디자인 기획안대로 다시 만들어오게. 왜 기술이 디자인을 따라잡지 못하는 건가?”

최지성 사장(현 삼성미래전략실장 부회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연구원들은 마치 불호령이라도 들은 듯 몸을 움츠렸다. 디자이너들이 처음 구상한 두께는 80mm였고 개발팀이 만들어온 시제품은 110mm였다. 줄이고 줄여서 만든 여섯 번째 시제품은 그렇게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개발팀은 처음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나사 하나부터 모든 부품의 크기를 줄였고 내부 회로를 일체화했다. 한 달 뒤 초기 디자인 콘셉트를 만족시킨 아홉 번째 시제품이 완성됐고 마침내 OK 사인을 받았다. 붉은 포도주가 담긴 와인잔 모습을 형상화한 보르도TV는 이처럼 힘든 과정을 거쳐 시장에 출시됐다.

보르도TV는 삼성전자 TV 사업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제품으로 기록됐다. 출시 6개월 만에 100만대, 8개월 만에 200만대 판매량을 돌파하며 역대 최단 기간 내 최대 판매량 기록을 세웠다. 삼성전자는 보르도TV의 성공에 힘입어 2006년 일본 소니를 누르고 세계 TV 시장 1위로 등극했다.

◆불가능은 없다=보르도TV의 디자인 핵심은 테두리(베젤)를 덮는 고광택 피아노 블랙 컬러였다. 삼성전자는 이를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사출(寫出)금형(金型) 기술을 찾아다녔다. 수소문 끝에 일본에서 전기열 대신 스팀을 활용하는 RHCM(Rapid Heat Cycle Molding) 공법을 발견했다.

이 공법이라면 은은한 광택이 어우러진 피아노 블랙 컬러를 구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으로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두려워한 일본 업체는 현지에서 베젤을 제작해 가져갈 것을 요구했다. 삼성전자 연구원들은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이 원하는 건 베젤이 아니라 기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전혀 소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같은 기술을 보유한 후지정공을 찾아 협의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밀고 당기는 협상 끝에 삼성전자는 일본 후지정공과 제휴를 맺는다. 삼성전자는 한국 협력사인 제일정공, 세화, 에이테크솔루션 등과 함께 이 공법을 활용해 고광택 피아노 블랙 컬러의 TV 베젤을 만들었다. 공법 이름도 스팀몰드(Steam Mold)로 새롭게 붙였다. 최지성 당시 사장은 “이런 기술이라면 세상을 한 번 흔들어 볼 수도 있겠다”며 막대한 투자 계획을 승인했다.

스팀 방식은 고온의 증기를 이용한다. 융착이 좋아 질감은 이전보다 훨씬 깔끔했다. 굳이 스프레이 페인트 도장을 할 필요가 없었기에 공정 단축과 원가 절감 효과가 있었고 친환경적이기까지 했다.

삼성전자 보르도TV에 처음 적용된 스팀몰드 공법은 TV뿐 아니라 AV, PC, 프린터와 에어컨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의 제품을 패션화했다. 세계 유수의 기업들은 일본에서 시작한 RHCM이라는 명칭 대신 삼성전자가 처음 붙인 스팀몰드라는 용어를 썼다.

◆불철주야 일 일 일=보르도TV의 디자인이 인기를 얻자 경쟁사들도 고광택 베젤을 적용한 제품을 따라서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는 경쟁사가 모방하기 어려운 앞선 기술 찾기에 몰두했다. 그렇게 고안된 것이 투명함 속에 또 다른 색깔을 구현하는 이중사출, 바로 ToC(Transparent and Opaque Color) 공법이었다.

삼성전자는 2007년 ToC 기술을 확보한 뒤 2008년 본격적으로 개발, 2009년 신제품에 적용할 계획을 세워뒀었다. 그러나 2007년 1월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으로 새롭게 부임한 윤부근 사장은 ToC 공법을 2008년 신제품에 적용하겠다며 생산계획을 짜보라고 지시했다. 연구원들은 이러한 계획 수정에 깜짝 놀랐다.

“100만대 정도 가능할 듯 합니다. 그러나 100만대 생산하는 것도 현재 기술 수준으로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100만대요? 그게 무슨 계획입니까. 2위와 격차를 더 벌리려면 꼭 2008년에 히트 제품을 출시해야 합니다. 500만대를 목표로 잡으세요. 2008년 1월 미국 CES에 신제품을 전시합시다.”


ToC 공법은 유럽 최고급 승용차에 한정적으로 장착되는 썬루프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 체화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삼성전자와 협력사 연구원들은 독일 금형 업체로 직접 찾아가 기술을 배워왔다. 제작된 금형을 한국으로 가지고 와 하나하나 분해해가며 불철주야 학습을 했고 그 결과 생산 기반을 마련했다.

ToC 기술이 적용된 크리스털 로즈 TV는 투명한 블랙 베젤 내에 있는 장미색이 빛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하는 디자인이 일품이었다. 마치 공예 작품과도 같았던 이 제품은 2008년 1월 CES 쇼에서 최고혁신상을 받았다.

삼성전자는 크리스털 로즈 TV의 판매 확대에 힘입어 2008년 세계 TV 시장에서 3년 연속 점유율 1위를 달성했다. 또 판매량 2000만대, 세계 점유율 20%, 매출 200억 달러를 돌파하면서 ‘트리플20’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퍼스트무버로 변신=2008년 4월 수원사업장의 한 회의실에선 논쟁이 펼쳐졌다. 윤부근 사장이 “2006년 보르도 신화를 이어갈 2009년 신제품으로 발광다이오드(LED) 백라이트 TV를 풀 라인업으로 가져가자”고 제안하자 한 임원이 2004년 소니의 실패 사례를 거론하며 제동을 걸었던 것이다. 소니는 이미 2004년 첫 LED TV를 출시한 바 있지만, 비싼 가격과 마케팅 소구 포인트를 제대로 짚지 못해 실패했다.


윤 사장은 “우리가 만들면 시장이 창출될 수 있다”며 “볼펜보다 얇은 20mm대의 초슬림 LED TV를 만들어오면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지시했다. 이미 삼성전자는 세계 TV 시장을 움직이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 개척자)로 변해있었다.

LED TV 개발을 맡은 50여명의 연구원들은 끝도 없는 밤샘 작업으로 얇아서 발생하는 열과 빛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매진했다. 삼성전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출시된 LED TV에 대해 ‘종(種)이 다른 새로운 TV의 탄생’이라는 마케팅 활동을 펼쳤다. 2009년 LED TV는 260만대가 팔려나갔고 6000억원의 막대한 영업이익을 올려줬다. 전 세계 TV 업체들은 삼성전자를 모방해 LED 백라이트를 탑재한 TV를 내놓기 시작했지만 시장점유율 1위는 역시 삼성이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6년 연속 TV 시장 1등을 달성한 삼성전자는 “아직도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았다”고 공언하며 스마트TV를 최근의 주력 제품으로 밀고 있다. 삼성전자는 주요 방송 콘텐츠 업체와 제휴 관계를 맺어 킬러앱으로 불리는 VOD 콘텐츠를 다량 확보했고,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도 세계 각국의 개발사, 개발자와 협력해 늘려나가고 있다.


올해 신제품에는 ‘진화하는 TV
라는 개념으로 CPU와 메모리 등 주요 부품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에볼루션키트가 탑재됐고 음성과 제스쳐 인식 등 다양한 혁신 기능이 녹아들어 있다.

아울러 액정표시장치(LCD)의 바통을 이어받을 새로운 종의 TV도 개발하고 있다.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가 주인공. OLED는 LCD보다 응답속도가 빠르고 명암비와 색감이 우수해 TV에 적용될 경우 장점이 크다. 스스로 발광하기 때문에 백라이트가 필요 없고 이에 따라 TV 두께도 절반 가까이 줄일 수 있다. 삼성은 R(적)G(녹)B(청) 유기발광물질을 각각 증착한 후 개별 화소의 발광 정도에 따라 다양한 색을 표현하는 RGB 기술 방식을 도입, 올해 하반기 신제품을 출시할 예정이다.


김현석 현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장(부사장)은 “55인치 OLED TV 양산 모델을 통해 앞으로 열리는 차세대 슈퍼 프리미엄 TV 시장에서도 주도권을 이어 갈 계획이라며 OLED TV와 함께 대형 스마트TV를 앞세워 최고의 화질과 품격있는 디자인, 일상을 보다 풍요롭고 스마트하게 만드는 콘텐츠까지 경쟁사와 비교를 거부하는 ‘초격차’ 전략을 이어 나가겠다”고 말했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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