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 반덤핑, 美 세탁 문화를 바꾼 기술의 힘
[디지털데일리 이수환기자]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삼성전자, LG전자, 대우일렉트로닉스 세탁기에 대해 반덤핑 관세 부과를 최종 승인했다. 23일(현지시각) 한국과 멕시코에서 생산된 세탁기를 대상으로 9.29~82.41%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기로 결정한 것.
각 업체별로 살피면 대우일렉트로닉스가 82.41%로 가장 높고 LG전자 13.02%, 삼성전자 9.29%의 반덤핑 관세를 받게 됐다. 또한 보조금 지급에 따른 상계관세로 인해 대우일렉트로닉스 72.30%, LG전자 0.01%, 삼성전자 1.85%가 추가로 부과됐다.
이번 ITC의 결정에 대해 국내 가전업체들은 보호무역주의로 판단하고 세계무역기구(WTO)와 미국 무역법원에 항소하는 등 적극적으로 대처할 계획이다.
◆세탁문화 바꾼 기술, 월풀의 기대는 보호무역주의=이번 세탁기 반덤핑 관세 부과는 미국 최대 가전업체인 월풀의 위기로부터 시작한다. 지난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국내 가전업체들의 미국 세탁기 시장점유율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최대 시장인 미국에 진입은 했지만 월풀이 장악하고 있는 세탁기 시장은 말 그대로 철옹성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의 세탁문화는 어두운 지하실에 세탁기를 두고 세탁물을 한꺼번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세탁 방식도 ‘톱 로드’라 부르는 욕조형 세탁조 가운데 커다란 봉이 자리 잡고 있는 형태였다. 드럼세탁기는 아파트나 일부 시장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미국의 주거문화를 고려했을 때 시장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국내 가전업체들은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미국 소비자들은 월풀 제품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대안으로 구입할만한 제품이 없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지하실이나 다용도실이 아닌 집안에 두고 쓰는 드럼세탁기가 등장했으니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에 인테리어까지 고려해 다양한 색상을 적용하고 진동과 소음을 최소화한 다이렉트 드라이브(DD)모터를 적용해 만족도를 끌어올렸다. 스팀을 통해 사용자 편의성까지 고려했다.
또한 시장점유율 확대를 위해 전자제품 전문 유통업체 ‘베스트바이(Best Buy)’, 주택용품 유통업체 ‘홈데포(Home Depot)’ 및 ‘로우스(Lowe’s)’, 대형 백화점 ‘시어스(Sears)’와의 유통 계약도 맺었다. 말 그대로 파죽지세.
월풀은 당황했다. 뒤늦게 드럼세탁기를 선보였으나 DD모터가 아닌 벨트식이라 진동과 소음이 컸다. 시장점유율은 빠른 속도로 떨어졌고 악성루머로 한국 가전업체들을 공격했으나 제대로 먹히지 않았다.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세탁기 시장에서 LG전자가 20.7%로 1위, 삼성전자는 17.4%로 2위다. 월풀은 16%에 그쳤다. 양문형 냉장고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각각 25.6%, 20.4%로 나란히 1위와 2위에 올랐다. 월풀은 7.4%로 선두권과는 거리가 멀다.
◆제3국에서 만든 세탁기로 대응할 듯=이번 세탁기 반덤핑은 미국 세탁문화를 바꾼 한국 가전업체들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고 봐야 한다. 이미 월풀이 냉장고와 세탁기에 대해 특허소송을 진행한바 있으나 모두 패소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1980년대 미국은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자 정부 차원에서 규제에 들어갔다. 미국에 수출되는 일본산 자동차 물량을 168만대로 제한하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를 펼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본 자동차업체들이 미국에 공장을 짓고 고부가가치를 만들 수 있는 대형 모델 시장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더구나 크라이슬러, 제너럴모터스(GM), 포드 등 이른바 ‘빅3’는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에 기댄 나머지 부도 위기에까지 몰리게 됐다.
현재 삼성전자는 작년 10월 인도에서 월풀을 상대로 디자인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세탁기, 에어컨, 냉장고, 관련 디자인 특허 5개를 월풀이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LG전자는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이 없지만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에서 소송을 진행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일단 삼성전자와 LG전자는 한국과 멕시코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생산한 세탁기를 미국에 공급하는 전략을 펼칠 계획이다.
LG전자 HA사업본부장 조성진 사장은 9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열린 프레스컨퍼런스를 통해 “ITC가 산업피해를 인정하면 생산지를 나누거나 제품을 프리미엄급으로 넘어가는 등 여러 가지 방안을 고민할 수 있다”고 언급한바 있다.
삼성전자 CE부문 윤부근 사장도 같은 날 열린 프레스컨퍼런스에서 “해외에 많은 현지 공장이 진출해 있고 환경이 바뀜에 따라 변화에 적응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수환 기자>shu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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