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무의미한 은행권 '퇴직연금 수익률' 경쟁… 정작 가입자 89% '초저위험 상품' 선호

강기훈 기자

연합뉴스

[디지털데일리 강기훈 기자] 은행권이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를 위해 사전지정운영제도(디폴트옵션)를 운영하고 있으나 제도 도입 취지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디폴트옵션'은 퇴직연금 가입자가 본인의 퇴직연금 적립금에 대해 별도로 지시를 하지 않을 시 금융사가 사전에 정한 방법으로 투자 상품을 자동으로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와중에 초저위험 상품과 고위험 상품의 중간 위험성격인 디딤펀드마저 은행권이 외면하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은행권이 퇴직연금 수익률 제고에 큰 관심이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2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말 기준 41개 퇴직연금사업자가 운영하는 퇴직연금 디폴트옵션 상품의 적립금은 32조9095억원으로 집계됐다. 올해 1분기 말 25조6461억원과 견줘 7조2634억원 늘어난 수치다.

사업자 별로 살펴보면, KB국민은행이 6조778억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IBK기업은행(4조8845억원), 하나은행(3조4184억원), NH농협은행(3조3398억 원), 우리은행(2조6353억원) 순이다.

은행들이 사실상 디폴트옵션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 중 89.2%인 29조3478억원이 초저위험 상품에 집중됐다. 이어 저위험(1조8772억원), 중위험(1조2011억원), 고위험(4834억원) 순이다.

확정기여형 퇴직연금(DC)과 개인형 퇴직연금(IRP)이 디폴트옵션 대상이며, 확정급여형 퇴직연금(DB)은 해당되지 않는다.

문제는 작년 7월 퇴직연금 수익률을 제고하고자 정부가 디폴트옵션을 공식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초저위험형에 가입자들이 몰린다는 점이다. 제도 도입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초저위험 상품의 연간 수익률은 평균 3.47%에 그쳤다. 이는 시중은행의 예금 금리 수준에 불과한 수치다.

상황이 이런데도 은행권은 퇴직연금을 유치하기 위해 앞다투어 수익률이 높은 상품을 홍보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 8월 보도자료를 통해 '고위험 포트폴리오1' 상품의 수익률이 연간 기준 20.59%에 달한다고 밝혔다. 은행권이 판매하는 상품 중 1위에 해당한다는 사실 역시 홍보하기도 했다.

하나은행 또한 7월 DC형 퇴직연금 수익률이 5분기 연속 시중은행 1위를 기록했다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애초에 디폴트옵션을 처음 도입했을 때 초저위험형 상품을 포트폴리오에 넣은 것 자체가 문제라는 주장이 나온다.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고자 디폴트옵션이 고안된 건데 수익률이 낮은 초저위험형 상품을 포함시키는 게 맞냐는 논리에서다.

실제로 미국, 영국, 호주 등 퇴직연금 선진국의 경우 원리금보장 상품인 초저위험형은 디폴트옵션에 들어가 있지 않다. 원금 손실 가능성이 있는 실적 배당형만 취급하는 것이다.

당초 입법 과정에서 초저위험형 상품은 디폴트옵션의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국내 은행들이 투자자의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이유로 초저위험형 상품 편입을 적극 주장했고, 정부는 이에 동의했다. 현재의 상황에 은행권의 책임이 상당 부분 있는 셈이다.

게다가 은행들은 금융투자협회가 야침차게 마련한 디딤펀드 또한 외면하고 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17일 기준 흥국자산운용 등 15개 자산운용사가 신규로 출시한 디딤펀드 설정액 총합은 223억5700만원에 불과했다. 흥국자산운용이 모그룹 계열사로부터 끌어온 초기 설정자금인 200억원을 제외하면 23억5700만원 수준이다.

디딤펀드는 주식과 채권 등 분산투자 전략을 통해 중장기 수익을 추구하는 연기금형 자산 배분 펀드를 말하다. 초저위험형과 고위험형 상품의 중간 성격을 띠고 있어 퇴직연금 내에서 디딤돌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디딤펀드를 디폴트옵션에 편입시키는 것에 주저하고 있다. 초저위험형 상품이 이미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데 굳이 라인업에 넣을 필요가 없다는 기류가 흐른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추가적인 금리 인하가 예상되는 만큼 초저위험형 상품의 수익률이 떨어질 공산이 크다"며 "디딤펀드 편입 등 은행들의 추가적인 포트폴리오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법 개정을 통해 선진국처럼 실적 배당형 상품만을 디폴트옵션으로 운용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은행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현실적으로 쉽진 않을 것 같다"고 내다봤다.

강기훈 기자
kkh@ddaily.co.kr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디지털데일리가 직접 편집한 뉴스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