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 삼성] ② 눈앞 당근 쫓은 결과 '처참'…흔들리는 '반도체 명가'
기로(岐路). 갈림길 내지는 어느 한쪽으로 결단내야 하는 상황을 이른다. 최근 위기론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삼성전자의 형편과도 맞닿아 있다. 표면적으로는 HBM 경쟁 주도권에서 뒤처진 것이나, 내부적으로는 의사결정 체계의 문제까지 거론된다. 위기를 딛고 진정한 '뉴삼성' 시대로 가기 위한 쇄신을 모색할 시점이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배태용 기자] 삼성전자는 한때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시장 주도권을 잃어가고 있다. 정현호 부회장이 이끄는 사업 지원 태스크포스(TF)의 단기 실적 중심 경영이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TF는 비용 절감과 단기 성과를 우선시하며 장기적인 기술 투자를 줄였고, 이 점이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의 경쟁력 약화를 불러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9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3분기 실적에서 메모리 분야에서 처음으로 SK하이닉스에 영업이익이 뒤처졌다. 이는 삼성 메모리 부문의 고부가가치 상품인 HBM(고대역폭 메모리) 중심의 성과를 확보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 비용 절감 중심의 TF 운영…메모리 경쟁력 약화 = HBM은 고성능 AI 연산과 데이터센터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엔비디아 등의 GPU(그래픽처리장치)에 필수적으로 탑재되는 차세대 메모리 기술로, 삼성전자는 최근 이 분야에서 핵심 고객인 엔비디아의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엔비디아 CEO 젠슨 황은 "삼성 HBM은 여전히 테스트와 엔지니어링 작업 중"이라며 "문제는 없지만,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SK하이닉스가 HBM 시장에서 더 우세한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했다.
삼성이 HBM 성능 경쟁에서 뒤처진 이유는 근본적으로 개발 투자와 연구 인력 배치의 실패에 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삼성전자는 한때 HBM 전담팀을 운영하며 이 기술에 집중했으나, HBM이 수익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보다 단기적으로 실적 개선을 이룰 수 있는 사업에 집중, 당시 DS부문장이었던 김기남 고문은 2019년 HBM 전담팀을 축소했다. 이후 삼성은 HBM 기술 발전에 필요한 경험과 연구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고, 시장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고난이도 공정을 계속해서 고수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요인으로 지목된다. 삼성전자는 현재 HBM을 생산하는 데 있어 TC-NCF(Thermo Compression-Non Conductive Film)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기존의 범프 기법과 달리 필름을 사용해 미세한 접합을 구현하는 방식이지만, 제작 공정이 복잡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특히 고속 연산과 고온 환경에서의 안정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점에서 한계도 있다고 전해진다.
이에 반해 경쟁사는 액체형 언더필 재료를 사용해 칩 간 정밀한 접합을 구현하는 MR-MUF(Mass Reflow-Molded UnderFill) 방식으로 HBM을 생산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수율과 안정성을 갖추고 있어 엔비디아 같은 고객사의 기준에도 맞추고 있다. 최근 경쟁사는 세계 최초 16단 HBM3E 개발하고, 이 역시 MR-MUF 방식으로 만드는 게 최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가 HBM 기술력에서 경쟁사 대비 뒤처지는 이유가 이러한 생산 방식에서 기인한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삼성전자가 MR-MUF 방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방식을 구현하는 장비를 생산하는 한미반도체와의 관계 악화에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미반도체는 과거 삼성전자의 자회사 세크론(현 세메스)이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한미반도체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삼성전자는 한미반도체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세메스에서 관련 장비를 들여오는 상황으로 전해진다. 일부에서는 삼성전자가 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고 한미반도체와의 협력을 재개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었다.
◆ 3나노 수율 문제…시스템LSI까지 압박 = 파운드리도 문제다. 삼성전자는 과거 TSMC와 파운드리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나, 최근 들어 두 회사 간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2024년 2분기 기준으로 TSMC의 시장 점유율은 62%에 달하지만, 삼성전자는 11%에 머물렀다.
이러한 격차는 3나노 공정에서 비롯된 문제들로 인해 더욱 심화됐다.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3나노 공정을 개발하며 기술적 우위를 선점하려 했으나, 수율 문제로 인해 주요 고객사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특히,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구조를 적용한 3나노 공정은 기존 핀펫(FinFET) 공정보다 난이도가 높아 수율 안정화에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에 따라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주요 IT 기업들이 삼성 대신 TSMC를 선택하게 됐고,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부문은 오랜 기간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삼성전자는 일부 파운드리 라인을 메모리 생산 라인으로 전환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평택과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위치한 공장에서 이러한 전환이 이뤄지고 있으며, 이는 파운드리 부문의 적자 폭을 줄이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파운드리 수율 문제로 인해 시스템LSI 사업부의 경쟁력 약화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 시스템LSI 사업부는 스마트폰, 가전, 자동차 등에 들어가는 반도체 칩을 설계하는 부서로, 특히 엑시노스(Exynos)라는 삼성의 자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개발해 왔다. 그러나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수율 문제로 시스템LSI가 설계한 칩을 생산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며, 이로 인해 주요 스마트폰 모델에 엑시노스를 채택하는 데 한계가 생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실제로, 최근 갤럭시 S24 시리즈에는 삼성의 엑시노스와 함께 퀄컴의 스냅드래곤 칩이 동시에 사용됐다. 삼성의 파운드리가 엑시노스 생산에 필요한 높은 수율을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다. 자사 AP의 점유율을 늘리기 위해 엑시노스 채택을 추진하고 싶어도, 파운드리의 생산 안정성 문제로 인해 퀄컴 칩을 병행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설상가상 최근 업계에서는 내년 출시될 갤럭시 S25 시리즈에 엑시노스를 전량 배제하고, 글로벌 시장 전반에 퀄컴 칩만을 사용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만약 이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시스템LSI 사업부는 자체 AP를 통해 스마트폰 경쟁력을 높이고자 했던 전략의 변화를 고민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반도체 외에 모바일 부문에서도 위기감을 드러내고 있다. 올해 삼성전자와 애플의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점유율은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다. 시장조사업체 카날리스(Canalys)에 따르면, 3분기 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은 삼성전자가 지난해 동기(5860만 대) 대비 하락한 5750만 대의 출하량를 기록, 1위 자리를 지키긴 했다. 애플은 지난해 3분기 17%의 시장 점유율로 5000만 대를 출하를 기록했으나, 올해는 18%, 5450만 대를 출하하며 삼성전자를 쫓아오고 있다.
문제는 애플이 최근 공개한 아이폰 16시리즈에 온디바이스 AI '애플 인텔리전스' 기능을 도입하면서 삼성전자를 추격하고 있는 것. 주요 리서치 업체들이 올해 말부터 내년 사이에 선보일 '애플 인텔리전스' 기능 업데이트에 출하량도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씨티그룹은 내년 아이폰 연간 판매량이 올해와 비교해 9% 증가하며 크게 반등할 수 있다고 예측했으며,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도 하드웨어 및 인공지능 투자 확대가 성장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며 애플 실적 및 주가에 긍정적 전망을 내놓았다.
또한 삼성전자가 선도하던 폴더블폰 시장에서도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는 초기 폴더블폰 시장을 선도하며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나, 이제 다수의 경쟁 업체들이 폴더블폰을 출시하며, 이 시장도 더는 독점 영역이 아니어서다. 업계에 따르면, 애플은 최근 삼성디스플레이와 협력을 통해 폴더블 패널의 최종 테스트를 진행, 연내 아이폰용 폴더블 패널의 스펙과 물량을 확정할 계획으로 전해진다.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내년 출시될 아이폰 17시리즈에서 폴더블폰을 출시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와 함께 중국기업 화웨이는 세계 최초로 화면을 세번 접는 '트리플 폴더블' 폰인 메이트 XT를 출시하며 주목받았다. 삼성전자가 더 이상 이 시장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평가가 나오는 배경이다.
업계는 반도체, 모바일 분야에서 삼성전자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단기 성과에 치중한 경영 방식과 관련이 크다고 진단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단기 실적을 우선한 경영 방식이 지속되면 기술 투자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고, 이는 장기적인 경쟁력 약화로 직결된다"라며 "삼성전자는 지금이라도 장기적인 기술 투자와 조직 개편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다시 확보할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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