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2024결산/소부장]수요 절벽에 미중 갈등-韓 내홍까지…불확실성 가중된 반·디·배

고성현 기자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 [ⓒSK하이닉스]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 [ⓒSK하이닉스]

[디지털데일리 고성현 기자] 지난해 시작된 생성형 인공지능(AI) 열풍으로 수요 반등의 기대를 모았던 국내 첨단 산업은 대외적 불확실성 가중에 따라 또다른 위기에 놓이게 됐다. 심화되는 미중 갈등과 재집권에 성공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 대외 경제 변수 및 국가적 혼란 등이 기업 경영 환경을 둘러싸고 있어서다. 올해 지속된 수요 절벽이 내년 개선될지 여부도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등 산업에 영향을 줄 핵심 요소로 꼽히고 있다.

◆'HBM 열풍' 반도체, 제품 양극화·경쟁 심화 등 도전 앞둬

국내 반도체 산업은 올해 상반기 장밋빛 반등이 예상됐다. 생성형 AI 열풍에 따라 D램을 수직적층한 고성능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본격적으로 채용되면서 미진한 PC·모바일 수요를 대체해줄 것으로 기대받은 덕이다. 실제로 지난해 수요 절벽 및 재고 확대에 따라 분기별 조단위 적자를 기록해 온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흑자전환한 이래 ▲1분기 2조8860억원 ▲2분기 5조4685억원 ▲3분기 7조30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이례적인 회복세를 기록했다.

HBM 수요 폭증에 따른 범용 수혜도 전망됐다. D램 생산이 HBM 용도로 집중되면서 시중 과다 공급된 D램 재고가 소진되고, DDR5 D램 등으로의 자연스러운 전환이 이뤄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다. 하지만 글로벌 경기침체의 장기화와 범용 서버의 투자 침체, 되살아나지 않는 PC·모바일 소비자 수요로 기대했던 메모리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오롯이 HBM에만 집중되는 형국을 보였다.

수요가 HBM에만 집중되자 자연스럽게 범용 메모리반도체 시황은 심한 변동성을 보였다. 하반기에 접어들며 D램 가격이 소폭 상승하는가 싶더니, 재고 축적을 마친 OEM들이 구매를 줄이며 가격도 점차 줄게 됐다. 낸드 역시 AI데이터센터에 활용되는 기업용SSD(eSSD) 중심으로 강세를 보였지만 범용은 상승 동력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던 하반기 미국의 반도체 기술·생산 견제로 내재화에 주력하던 중국 업체들이 범용 메모리반도체 시장 판도를 뒤흔들었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 등이 그동안 늘려 온 설비투자를 바탕으로 저가 판매 공세를 펼쳤고, 이에 따라 DDR4 D램의 가격 낙폭이 커지며 수익성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은 기존 성숙공정 라인을 DDR5 D램 및 첨단 공정으로 전환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AI에 집중된 수요에 따라 범용-HBM 간 양극화가 심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양극화 추세에 따라 국내 메모리반도체 소재·부품·생태계의 환경도 불확실성이 들어 찬 모습이다. 메모리반도체 중심의 패키징 매출을 냈던 반도체 테스트·후공정 업체(OSAT)들은 일부 업체 외 크나 큰 타격을 받았고, 장비 역시 중국의 자국 중심 공급망 형성과 미진한 투자 등에 따라 실적을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서도 삼성전자 파운드리의 설비투자 연기로 인한 장비 업체들의 미국 진출, 평택향 투자 지연 등이 발생한 바 있다.

얼티엄셀즈 3공장 전경 [ⓒ얼티엄셀즈]
얼티엄셀즈 3공장 전경 [ⓒ얼티엄셀즈]

◆中 공세 심해진 디스플레이·배터리, 내년 판도 역시 험난

애플 아이폰15의 수요 감소로 이전보다 심화된 비수기를 겪었던 디스플레이 패널 업계는 애플 내 공급망 입지를 탄탄히 하며 올해 위기를 넘겼다. 삼성디스플레이가 굳건한 애플 스마트폰·태블릿 내 패널 공급 입지를 구축한 가운데, LG디스플레이가 스마트폰용 OLED 패널 납품 비중을 늘리며 중소형 중심의 수주 사업 비중을 높인 덕이다. 중국 BOE, 차이나스타(CSOT) 등이 아이폰 진입을 노렸으나 승인 지연이 지속되면서 국내 업계의 독보적 위치도 강화되는 모양새다.

이와 별개로 OLED 가격을 낮추는 저가 공세 판도는 여전히 심화되고 있다. 중국 업체들이 지난 LCD 패널과 마찬가지로 OLED 시장에서도 저가 공세 중심의 '치킨 게임' 구도를 만들면서 국내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스마트폰용 OLED의 경우 국내 양대 패널 업체가 우위를 보이고 있지만, 중국·대만 OEM 등이 중심이 된 노트북·태블릿 등 시장에서는 중국 기업들이 점유율을 크게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배터리 업계는 막대한 초기투자 이후 전기차 수요 부진에 따른 생존경쟁의 판도가 꾸려졌다. 중국 중심 저가형 제품인 리튬인산철(LFP)배터리가 글로벌 자동차 업체 대상 입지를 굳힌 가운데, 프리미엄 요소를 부각했던 삼원계 배터리가 화재 안전성·높은 가격 등을 이유로 채택되지 못한 탓이다. 이에 국내 배터리사도 지난해부터 고전압 미드니켈, LFP, 코발트 프리 등 저가형 제품 개발에 나섰지만, 중국과의 경쟁 및 양산 시기 등을 이유로 당장 내년 실적에 기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K-배터리 텃밭'으로 꼽혔던 미국 내 전기차 수요가 급격히 둔화하면서 기존에 집행하던 투자에도 이상기류가 흘렀다. 포드·제너럴모터스(GM) 등이 전기차 판매 계획을 수정하면서 배터리 생산 계획 및 설비투자도 중단되거나 일부 밀리기 시작했고, 각 기업별 유동성 위기 및 투자금 확보 등 재원 충당이 필수가 되면서 재정적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전기차·신재생에너지에 비판적인 기조를 내세웠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집권하게 되면서 정책적 불안 요소가 커지는 모습이다. 트럼프 정부가 내년 가동할 경우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에 대한 세제혜택 감소, 전기차 구매 유도 정책의 동력 상실 등이 우려되는 만큼 대책이 시급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4일(현지시각)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연구소(AFPI) 행사에 참석해 연설한 후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14일(현지시각)플로리다주 팜비치의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열린 ‘아메리카 퍼스트’ 정책 연구소(AFPI) 행사에 참석해 연설한 후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 AP 연합뉴스]

◆'자국우선주의' 국가전 경쟁 심화…韓 정부는 오히려 뒷걸음질

내년에는 자국우선주의 기조를 강화해 온 미국이 트럼프 당선인 재집권으로 더욱 힘을 얻은 가운데, 저가 공세에 탄력이 가한 중국이 한국 첨단 제조산업을 쫓는 양상이 그려지고 있다. 국내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세우기는 커녕, 비상 계엄 사태 및 혼란 가중으로 인한 원/달러 환율 변동성 확대·반도체특별법 계류 등 주요 정책 시행 지연 등의 내홍을 겪고 있다. 특히 국가 간 외교 상황이 기업에 직결되는 현 시점에서 불확실성을 높여 기업이 국가 지원 없이 글로벌 경쟁에 마주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온다.

특히 원/달러 환율 급증으로 인해 원자재 매입 가격에 부담이 생긴 점은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업계의 장기적인 불안 요소로 지목된다. 단기적으로는 수출 확대에 따른 환차익 및 달러 중심 거래를 통한 영향 최소화로 큰 문제가 없지만, 불안한 정국이 지속되며 환율 변동성이 커진다면 해외 수입의존도가 높은 소재·부품·장비에 대한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업계 관계자는 "환율 변동성은 대기업 등 주요 제조사의 부담도 가중시키겠지만, 비교적 재무 기반이 약한 국내 소재·부품·장비 생태계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며 "이미 업계 내 투자 지연과 제품 양극화로 버티기에 돌입한 기반 생태계가 내년을 불확실성이 심화된 상태로 맞이한다면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국면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산업 정책 추진에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당장 반도체산업의 경쟁력 강화 및 혁신성장을 위한 특별법(반도체특별법)에 대한 여아간 합의처리가 기대하기 어려워졌고, 국내 산업단지의 전력망을 충당하기 위한 국가 기간전력망 확충 특별법 등 기타 사안도 후일을 도모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일각에서는 내년 미국 트럼프 정부 출범에 따라 우리 입장을 전달하고 대응하기 위한 정무적 활동에서도 힘을 잃게 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이맘때 연례 경영전략회의를 열어왔던 국내 대기업들의 마음가짐도 사뭇 다른 것으로 전해진다. AI·반도체 등 첨단전략산업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트럼프 리스크'의 대응책 마련에 분주한 가운데, 계엄사태와 탄핵 정책이라는 정치적 현안이 변수로 떠오르면서 대응 전략 모색이 필요해진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당장 계엄 사태나 탄핵 정국이 기업에 영향을 주진 않겠지만, 중장기적으로 기업 신뢰도 및 공급망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는 등 여파가 적지 않을 것"이라며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고, 국가적 지원마저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내년 경영을 위한 전략이 어느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라고 전했다.

고성현 기자
naretss@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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