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앤디 그로브, ‘무어의 법칙’을 실현한 위대한 지휘자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인텔을 일궈낸 앤디 그로브 전 회장이 지난 21일(현지시각) 타계했다. 193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넘어와서 페어차일드반도체 연구원으로 일하다 1968년 인텔에 합류한 그는 마이크로프로세서유닛(MPU)을 통해 세상이 본격적인 디지털 세상으로 진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1987년 인텔 최고경영자(CEO)에 올라 2005년 이사회 의장을 지낸 후 완전히 은퇴하기까지 실리콘밸리에 끼친 영향도 엄청났다.
인텔을 앤디 그로브가 창업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성공가도를 달릴 수 있던 원동력의 핵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인텔은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가 창업했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반도체 업계의 유명인사였지만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노벨상 수상자 윌리엄 쇼클리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함께 일했지만 윌리엄 쇼클리는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는 회사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이직했던 페어차일드반도체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스스로 창업을 하게 됐다. 앤디 그로브는 인텔의 첫 번째 직원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앤디 그로브가 인텔 합류하기 이전인 1967년 쓴 첫 번째 저서 ‘반도체의 물리와 기술’이라는 책과 1977년 방한한 윌리엄 쇼클리로 인해 전 삼성전자 황창규 사장(현 KT 회장)이 반도체에 평생을 바치기로 결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가 전 세계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서 독보적인 1위를 달성하는데 있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셈인데, 정작 윌리엄 쇼클리는 인텔 창업자 두 사람과 함께 앤디 그로브도 싸잡아 배신자라고 몰아붙였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인텔에 본격적으로 합류한 앤디 그로브는 고든 무어, 로버트 노이스와 찰떡궁합을 보였다. 최초에는 로버트 노이스가 설계한 반도체 회로를 앤디 그로브가 실제 제품에 접목했고 고든 무어는 기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앤디 그로브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데 있어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작업에 관여했으므로 마당발이나 다름없었는데 형편없는 수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지금도 수많은 반도체 설계가 이뤄지고 있지만 이를 제품화하고 수율을 안정화시키는 작업에서 제품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앤디 그로브의 역할은 인텔에게 있어 절대적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설계라도 사용자가 이용하는 제품에 장착되기까지의 과정이 없다면 무용지물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반도체 공정에 방진복이 당연하다고 여겨졌지만 197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먼지가 반도체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잘 몰랐다. 수율을 높이기 위해 연구개발(R&D)에 매진하면서 앤디 그로브는 방진복, 그러니까 온몸을 감싸 먼지를 막는 옷을 1973년 고안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문제가 발생하면 고든 무어에게 가지고 갔고, 고든 무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명쾌한 답을 내놨다. 그만큼 고든 무어가 R&D에만 몰두했다면 앤디 그로브는 실무에 강했다. 반대로 말하면 앤디 그로브가 지시하는 사항에 따라 인텔이 움직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고든 무어가 구상하고 앤디 그로브가 실행하는 인텔은 승승장구했다. 메모리에서 비메모리 반도체로의 전환, ‘인텔 인사이드’ 마케팅에 이르기까지 인텔의 최전성기를 합작했다. 특히 앤디 그로브는 훌륭한 경영자이기도 했는데 “성공은 자만을 낳고, 자만은 실패를 낳는다. 오직 편집광만이 살아남는다”, “삼류 기업은 위기에 의해 파괴되고, 이류 기업은 위기를 이겨내며, 일류 기업은 위기로 인해 발전한다”는 말을 남겼다. 인텔은 성공의 아이콘이면서 실험의 도구가 됐으며 이론에서 실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앤디 그로브의 유산, ‘경험’=인텔은 고든 무어의 ‘무어의 법칙’처럼 절대적인 이론이 뒷받침되어 있다. 지난 20년 동안 무어의 법칙을 통해 형성된 직간접적인 영향은 최소 3조달러(약 3000조원)에서 최대 11조달러(약 11경원)에 이르는 미국 국내총생산(GDP) 성장을 만들어낸 것으로 조사됐다. 최근 미세공정의 한계로 인해 무어의 법칙이 깨졌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으나 인텔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창업자의 이론이어서가 아니라 그만한 근거를 내세웠다. 무어의 법칙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라는 점, 첨단 공정의 R&D 비용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인텔은 천문학적인 비용 증가를 감안해 현재의 공정으로 10년 동안 반도체를 생산할 경우 2700억달러(약 328조원)이 필요하지만 새로운 공정을 개발하고 무어의 법칙에 따라 칩의 크기를 줄이면 R&D를 포함해 1160억달러(약 140조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2010년까지 새로운 칩 개발에 10% 비용이 추가되어 왔다. 2015년 이후부터는 세대가 올라갈수록 30% 상승을 예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세화로 인한 수익이 R&D 비용을 치르는 것보다 낫다는 내용도 곁들이고 있다. 쉽게 말해 반도체를 R&D하는데 있어서 그만큼의 최적화된 경험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세공정의 한계로 인한 비용 증가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무어의 법칙이 지속될수록 인텔에 유리하다는 논리인데 바로 앤디 그로브의 유산 덕분이다.
어쩌면 앤디 그로브는 현재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반도체 미세공정의 한계를 진작 깨달았는지 모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R&D 비용 이상의 경험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인텔이 ‘터널링 펫(TFET)’, ‘강유전체 펫(FeFET)’, ‘스핀트로닉스(spintronics)’ 등 어느 정도 기반 기술이 마련된 기술에 대해서도 전통적인 CMOS(Complementary Metal-Oxide Semiconductor) 공정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에 다소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반도체 개발 역사에 있어 기존 기술을 개량해 사용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철학이 깔려 있어서다.
무어의 법칙을 실현시킨 지휘자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위대한 유산은 그대로 남아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중이다. 인텔이 고든 무어와 앤디 그로브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적어도 규소(Si)라는 재질을 넘어서는 완전히 새로운 반도체가 등장해야 하고 당분간 그럴 조짐은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인텔의 진정한 진화는 시작되지도 않았는지 모른다.
<이수환 기자>shulee@insightsemic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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