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을'의 눈치보는 '갑'… 게임의 룰 바뀐 금융 IT시장
[디지털데일리 이상일기자] 지난 11일, LG CNS가 2000억원 규모의 산업은행 차세대시스템 구축 사업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국내의 한 금융IT 컨설팅 업체의 대표는 이렇게 평가했다.
“금융IT시장의 이정표와 같은 현상이다.”
LG CNS는 산업은행 차세대시스템 제안요청서(RFP) 접수 마감 이틀 전, 컨소시엄 구성업체들에 이번 입찰에 제안요청서 접수를 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전했다. 표면적으로 사업 수행 범위에 반해 배정된 사업예산이 적다는 이유였다.
물론 이번 LG CNS의 사업 불참에 대해 업계의 해석은 다양하다. 말 그대로 예산에 맞지 않는 방대한 사업범위가 문제라는 지적에서부터 내부적으로 충분한 준비가 이뤄지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분명한 것은 지난 9월 RFP 공고 후 약 2개월간 사업 참여를 위한 제안서 작성에 여념이 없던 LG CNS 입장에서도 이번 사업 불참은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업 관계자들에 따르면 LG CNS는 RFP 작성은 완료했지만 끝내 인쇄까지 넘어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전후사정을 떠나서, 대형 IT사업에 IT업체가 발을 빼는 모습은 과거라면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더구나 IT서비스업계에서 금융 IT시장, 특히 차세대시스템 시장의 공략은 매출 확대를 위해선 꼭 넘어야 할 산이었다. 은행의 경우 중견 IT서비스업체들이 기를 쓰고 진출하고자 했던 시장이기도 하다.
일단 시장에 안착하면 꾸준하게 사업 타진을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었고, 양보해서 명예를 위한 사업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이렇다보니 발주처인 금융사 입장에선 확실한 ‘갑’의 입장에서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금융사 관계자가 시도때도없이 호출하면 만사제쳐놓고 들어가야 했다. 많게는 수억원씩하는 벤치마크테스트(BMT), 제품검증(POC)도 무상으로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삼성SDS가 금융IT시장에서 빠져나간 이후 금융IT 시장의 구도는 반전됐다. 어느 순간 수요자 중심에서 공급자 중심으로 무게의 추가 기울었다.
여전히 계약서엔 '을'의 입장이지만 이제는 LG와 SK가 사업참여 여부를 주도적으로 결정한다. 양사가 맘먹고 담합이라도하면 출혈을 감수하지 않고도 알차게 대어를 낚을 수 있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이미 굵직한 금융IT 사업은 LG CNS와 SK(주) C&C 두 회사가 양분하는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지난 3월, 우리은행 차세대시스템 사업도 SK가 단독으로 입찰, 수의계약으로 진행됐으며 교보생명 차세대도 우여곡절 끝에 LG CNS로 넘어갔다.
대기업의 사업 참여가 제한된 일부 공금융 IT사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1금융사와 대형 2금융사들은 여전히 대기업 IT서비스업체들의 사업 참여를 당연시 하고있다. 제3의 대안을 찾지 않는다. 경험이 없다는 이유를 대지만 사실은 프로젝트가 실패했을 경우 후폭풍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삼성SDS가 빠지면서 상대방에 대한 견제와 조정이 적당히 작동하던 금융 IT시장의 정립관계가 무너진 것이다.
LG CNS와 SK(주) C&C간의 양강 구도가 정착되면서 이제 정신을 차려야 할 쪽은 프로젝트를 발주하는 금융사쪽이 됐다.
과거처럼 대형 IT사업에 업체들이 알아서 들어 오겠지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앞으론 대규모 금융 IT사업을 추진할땐, 미리 IT서비스업체들과 충분한 사전 교감을 거쳐 발주가 진행돼야 할 것"이란 조언이 나오고 있다.
더구나 발주시기도 IT서비스 업계에 인력 가용 시기와 규모 등을 미리 타진하고 조율해야 원활한 사업 추진이 가능할 것이란 관측이다. 결과적으로 질적인면에서 금융SI 시장은 상당히 성숙해(?) 졌다.
특히 금융사들이 앞으로 제대로 IT사업을 진행하려면 적절한 IT예산의 확보는 필수적이다. 예전과 달리 적자가 날 것이 뻔한 사업에 IT서비스업체들은 더이상 미련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저렴한 가격에 RFP를 내더라도 IT업체들이 알아서 제안하겠지라는 안이한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이다.
물론 하나의 사례로 시장 전체를 예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금융 IT시장의 게임의 룰이 바뀐것 만은 분명해보인다. 어느새 공급자 독점 시장이 돼버린 금융SI(시스템통합)시장, 제3의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금융권은 이같은 독과점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상일 기자>2401@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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