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해사고/위협동향

늘어나는 악의 도피처 ··· 디지털 성범죄, 왜 잡기 어렵나

이종현
[디지털데일리 이종현기자] 익명성 기능이 강화된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 사이버범죄가 늘고 있다. 특히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제작한 뒤 ‘텔레그램’을 통해 유포한 ‘n번방’ 사건은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고 있다.

n번방 같은 디지털 성범죄가 이토록 큰 범위로,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높은 보안성을 제공하는 텔레그램의 특성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메신저를 이용할 경우, 메신저의 사용 내역은 ▲발신자인 본인의 디바이스 ▲메신저의 서버 ▲수신자의 디바이스 등 3곳에 남는다. 본인 디바이스의 사용 내역을 지우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앱을 삭제하거나 대화를 삭제하면 된다. 텔레그램은 여기에 더해 수신자의 디바이스에 남은 본인이 보낸 메시지도 삭제할 수 있다. 최근 카카오톡 등도 해당 기능을 도입했으나 발송한 지 5분이 넘을 경우 삭제되지 않는 차이점이 있다.

본래 러시아 기업이었던 텔레그램은 러시아 정부의 서버 정보 제공 요청을 피해 독일, 영국, 싱가폴, 두바이 등으로 본사를 옮겨 다녔다. 보안에 가장 큰 방점을 둔 기업인만큼 데이터 제공 요청에 응할 확률은 높지 않다. 해외에 있는 서버를 압수수색하기도 어렵다.

또 ‘비밀채팅방’에는 한층 더 보안성이 강화된다. 별도로 설정된 비밀번호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채팅방은 서로 주고받은 대화를 일정 시간이 초과될 경우 자동 삭제·암호화되는 기능을 제공한다.

이 같은 보안 기능들은 총 참여자가 26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텔레그램 n번방의 운영자·참여자를 추적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이런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국민 반응은 뜨겁다. 지난 18일 ‘텔레그램 n번방 용의자 신상공개 및 포토라인 세워주세요’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26일 기준 262만명(26일 오전 10시 기준)이 참여했다. 역대 청와대 국민청원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빠르게 참여한 청원이 됐다.

도를 넘은 범죄에 대통령도 나섰다. 지난 23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경찰은 n번방 운영자 등에 대한 조사에 국한하지 말고 n번방 회원 전원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필요하면 경찰청 사이버안전과 외에 특별조사팀이 강력하게 구축됐으면 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24일 국민청원 답변 생방송에서 “디지털 성범죄는 사람의 영혼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사회 공동체마저 위협하는 중대한 범죄”라며 “이런 악질적인 범죄행위를 완전히 뿌리 뽑겠다는 각오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 생산자, 유포자는 물론 가담·방조자도 끝까지 추적·검거하겠다”며 강력한 수사의지를 전했다.

이들에 대한 수사는 체포된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와치맨’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하던 또다른 운영자의 스마트폰을 디지털 포렌식할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스마트폰에 저장돼 있는 연락처 등과 돈을 주고받은 내역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n번방 운영자·이용자는 안전성을 위해 암호화폐를 이용했는데, 보안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 부분을 노려 수사해야한다고 지적한다. 음지에서의 악질 사이버범죄를 막기 위해서는 ‘돈줄’을 막아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한 전문가는 “다크웹, 텔레그램 등 익명성을 이용해 사이버범죄를 행하는 이들 대다수가 암호화폐를 이용하고 있다. 암호화폐이니만큼 일반 자금흐름보다 추적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거래소가 협조할 경우 충분히 추적 가능하다”며 “국내 4대 암호화폐 거래소가 수사기관에 정보 제공을 협조하기로 한 만큼 대대적인 n번방 운영자 및 이용자 추적이 이뤄질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한편 n번방 같은 디지털 성범죄가 텔레그램에서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토르 등 익명성이 강화된 특정 브라우저를 통해 접속할 수 있는 ‘다크웹’에서는 사이버범죄가 만연하다. 세계 최대 아동 음란물 웹사이트라 불리던 ‘웰컴투비디오’의 운영자와 유료 이용자 다수가 한국인이었다.

또한 일각에서는 사이버범죄자들이 이번 사건으로 표면화된 텔레그램 대신 ‘디스코드’로 이주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디스코드는 게이머들이 정보공유 및 채팅을 위해 자주 활용하는 메신저로 텔레그램처럼 보안성이 강한 것으로 유명하다.

보안업계 관계자는 “표면화되지 않은 악질적인 사이버범죄의 규모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며 “국내에서도 다크웹이나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을 통해 마약을 거래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다크웹이나 암호화폐를 통한 사이버범죄가 늘어나는 만큼 수사기관이나 보안업계서도 이를 추적하는 기술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표현의 자유를 위한 익명성이 이렇게 악용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bell@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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