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록 칼럼

[데스크칼럼] 영웅시대의 퇴장, 숙제로 남은 '이건희'의 유산

박기록
삼성의 글로벌 브랜드 파워는 애플, 구글, 아마존 등 세계 최고 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고, 우리 국민들에게는 또 다른 국격이고 자부심이다.

삼성을 ‘초일류 브랜드’로 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이 지난 25일, 향년 78세로 타계했다. 대한민국 경제계의 거목(巨木)이 영면하자 경제계 뿐만 아니라 각계에서 깊은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인해 더 어려워지고 팍팍해진 경제상황 때문일까, 포털과 SNS 등 온라인에서도 좋았던 옛날을 회상하며 고인을 그리는 애틋한 추모의 글이 넘쳐난다.

이 회장은 2014년 5월, 급성 심근경색으로 투병에 들어간 이후 타계하기까지 6년 이상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예전의 건강한 모습으로 경영일선에 재기할 것이란 기대는 적었지만 막상 부고를 받게되니 그 황망함은 어쩔 수 없다.

‘영웅시대의 퇴장’, 이 회장의 타계 소식을 듣고난 후 첫 소회다.

이 회장의 일대기를 다룬 몇권의 책들이 이미 몇년전에 출간된 바 있다.

책에는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면서 남긴 마누라, 자식빼고 다 바꾸자는 유명한 어록을 비롯해 1996년 중국 베이징에서 정치는 4류, 행정은 3류라고 일갈했다가 당시 YS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일화 등 27년간 삼성그룹을 이끌면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고 감동적으로 읽었던 대목은 역시 이 회장이 1980년대 ‘반도체 신화’를 일구기 시작하는 과정이었다. 엄청난 설비 투자비용 뿐만 아니라 반도체 기술 인력의 확보, 어느것 하나 여의치 않았다.

이 과정은 마치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이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과 울산의 조선소 예정 부지와 설계도만으로 그리스 선주를 설득해 선박을 수주하는 것이 연상될 만큼 영화같다.

지금 생각하면 운명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패하면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이 피땀흘려 일궈낸 삼성을 하루아침에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반도체는 우리가 꿈도 꾸지못할 미국, 독일, 일본 등 몇몇 기술 선진국들만이 독점하던 최첨단 하이테크 분야였기 때문이다.

냉철한 이성보다 뜨거운 가슴과 열정이 때론 훨씬 더 앞서 나갔던 시대, 비록 깨지고 좌절되더라도 그 시대를 용감하게 이끌었던 주인공들을 우리는 ‘영웅’이라 부르고, 그 빈자리를 그리며 새삼 그 용기와 패기를 아쉬워한다.

어느덧 30여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은 반도체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으며, 지금의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든든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반도체 신화를 꿈꿨던 청년 이건희 처럼,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기업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과감한 도전을 향한 담대함과 용기이다.

과연 지금 우리는 두려움 없는 도전에 나설 용기를 가지고 있는가?’ 이 회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첫번째 질문이다.
삼성은 스마트폰 분야에선 애플과 함께 세계 시장을 놓고 자웅을 겨루고 있다. 아마도 그 시작은 25년전인, 지난 1995년 삼성 구미사업장 운동장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당시 애니콜 등 불량품 15만대를 모아놓고 화형식을 가졌다. 품질경영에 대한 결기를 직원들에게 직접 보이지 않았더라면 과연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 품질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한가?’ 이건희 회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두번째 질문이다.

정치는 때론 삼성에게도 능력밖의 일이었다. 이 회장이 삼성을 이끄는 기간동안 6명의 대통령이 바뀌었다. 정치과잉의 시대, 권력의 지형이 바뀔때마다 국내 대기업들은 그에 적절히 화답하면서 생존을 모색해야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법적인 논란과 일탈이 발생하기도 했다. 삼성도 자유로울 수 없는 부분이다. 이제 이런 과거와 완전히 절연해야하는 것은 남겨진 숙제다. 이 회장이 “우리나라의 정치력은 4류, 행정력은 3류, 기업능력은 2류”라고 일갈했던 것이 벌써 25년전이다.

‘과연 우리 정치와 행정은 기업이 혁신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준비가 돼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우리에게 던지는 세번째 질문이다.

삼성은 글로벌 IT기업들을 제치고 반도체, 스마트폰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것보다 몇곱절 더 힘든 일은 아마도 1위의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일 것이다. 1980년대 일본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기라성 같은 전자회사들, 그리고 전세계휴대폰 시장을 석권했다가 하루 아침에 몰락한 노키아, 모토로라의 사례는 반면 교사다.

이건희 회장의 유업을 이어받은 이재용 부회장은 수년전부터 2위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초격차’이론으로 삼성을 재무장시키고 있다. 지난 2018년 총 30조원을 투자해 착공한 평택 2공장은 업계 최초로 극자외선(EUV) 공정을 적용한 3세대 10나노급(1z) LPDDR5 모바일 D램 양산에 나서고 있다. 초격차 전략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같은 초격차 전략은 결국 이건희 회장이 강조했던 기술 중심기업이라는 삼성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과연 1위로 올라서더라도 초심을 지키며 끊임없이 혁신에 매진할 수 있는가?’ 이건희 회장이 우리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다.

영면에 든 이건희 회장이 우리에게 던진 질문은 곧 대한민국의 IT산업계와 기업인들이 가슴에 새겨야할 소중한 유산이기도 하다.

공과를 뒤로하고, 대한민국 경제에 헌신했던 고인의 빈자리가 매우 크게 느껴진다. .

<박기록 편집국 부국장>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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