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블러는 변화의 속도가 빨라지면서 존재하던 것들의 경계가 뒤섞이는 현상을 뜻한다. 코로나19 팬데믹 확산과 디지털 전환 가속화로 전세계에서 산업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빅블러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게임 룰이 바뀌고,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이 달라지고, 비즈니스 영역 구분이 모호해졌다. 한국도 이에 빠르게 대응해 빅블러 시대 글로벌 주도권을 선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와 관련 <디지털데일리>는 2022년 임인년을 새해를 맞아 IT 기업들의 합종연횡·신시장 개척 등 위기 대응 전략을 살펴보고 변화에 대응하는 모습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이상일기자] “은행 서비스는 필요하지만 은행은 아니다(Banking is necessary, banks are not)” 1994년 당시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이었던 빌 게이츠의 말이다.
이로부터 11년이 지난 2015년, 세계 최대 투자은행 중 하나인 골드만삭스의 로이드 블랭크페인 회장은 “골드만삭스는 정보기술(IT) 회사”라고 밝혔다.
한국에선 2018년 10월 하나금융 김정태 회장이 “미래의 하나금융그룹은 데이터를 활용해 고객에게 최고의 경험을 선사하는 ‘데이터 기반 정보회사’가 되어야 한다”며 디지털 비전을 선포했다.
지난 25년간 금융권은 상전벽해 수준으로 변화해왔다. IT기술의 발달과 함께 금융사 자체의 경쟁력도 커졌으며 서비스도 다변화됐다. 특히 우리나라는 금융공동망이라는 유례없는 은행권 공동 지급결제시스템을 중심으로 송금과 ATM 이용에 있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편의성 면에선 인정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은행, 증권, 보험, 카드 등 금융업 라이선스를 받은 금융사 위주의 폐쇄적인 생태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간편 송금으로 대변되는 토스의 등장과 인터넷전문은행인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토스뱅크의 금융업 진출로 인해 금융 소비자들은 기존 금융사 DNA와 다른 기업이 금융시장에 뛰어들었을 때 보다 더 간편하고 편리한 서비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핀테크 열풍과 블록체인, 가상자산, 대체 불가능한 토큰(NFT)와 같은 새로운 디지털 자산의 등장은 금융사 중심의 지급결제 시스템에도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상황은 우리나라는 물론 전세계의 비대면 생태계를 가속화하는데 일조했다. 금융사들 입장에서도 대면거래, 대면영업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온라인 환경에서의 경쟁이 불가피해진 상황이다.
무엇보다 네이버, 카카오 같은 플랫폼 기반의 빅테크 업체들의 금융시장 진입은 기존 금융권을 긴장시키고 있다. 막강한 사용자 기반과 편의성, IT와 디지털을 무기로 금융은 물론, 유통, 물류,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확대하는 상황에서 빌 게이츠의 말대로 ‘은행 없는 은행 서비스’가 가능한 시대에 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탈 은행, 금융 물결은 국내에서도 본격화되고 있다. 은행과 타 업종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빅블러’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은행연합회가 서울 중구 소재 은행회관에서 개최한 ‘디지털 시대의 금융 겸업주의’ 세미나에서 김광수 은행연합회회장은 “많은 ICT기업이 금융업에 진출해 혁신을 주도해나가면서 ICT·금융간 경계가 흐릿해지는 빅블러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며 “특히 빅테크 플랫폼의 경우 원래 수행하던 ICT·유통·통신·여행 등 다양한 생활밀착형 서비스와 금융을 융합한 생활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그 결과 시장으로부터 기존 대형 금융회사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금융권의 빅블러는 테크기업의 금융시장 진출로 가속화되고 있다. 투이컨설팅 박소연 선임은 “구글, 아마존, 애플, 알리바바, 삼성전자 등과 같은 IT 공룡 기업들이 빅블러 현상을 주도하고 있다. 앞선 IT기술을 바탕으로 대규모 고객네트워크 기반의 플랫폼 비즈니스 모델로 성공하고 있다. 플랫폼을 통하여 고객을 점유하고, 모든 것을 팔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금융사들의 업권을 넘어서는 사업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우리은행은 편의점 세븐일레븐과 제휴를 맺고 우리WON뱅킹에서 편의점 상품을 주문, 배달해 주는 'My편의점'을 시작했다. 신한은행은 배달앱 '땡겨요'의 시범 서비스를 지난달 22일 오픈했다.
엔씨소프트는 KB증권과 넥슨은 신한은행과 협력하기도 했다. 게임과 금융서비스가 본격적으로 만나 경계를 허물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당국의 빅블러 가속화를 위한 행보도 본격화되고 있다. 금융당국은 금융여건 변화를 감안해 ‘업무범위 확대’ 등 금융업권별 제도 정비에 나섰다. 이를 통해 은행의 원활한 신사업 진출, 종합재산관리자 역할 강화 등을 위해 업무범위 확대를 추진하는 한편 플랫폼사업 등 부수업무 범위 확대 검토, 신사업 규제샌드박스 활용 지원등에 나설 계획이다.
다만 금융권의 빅블러 현상은 아직은 초기 단계에 불과하단 지적이다. 특히 4대 금융그룹과 대형 금융사들이 얼마만큼 효과적으로 새로운 융합 서비스에 대응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빅테크 기업에 대응하기 위해선 민첩성 있는 조직 구성과 사업 의사결정이 일어나야 하는데 고질적인 금융사의 의사결정 구조는 문제다.
하지만 올해 초 주요 금융기업들이 조직개편을 통해 조직의 의사결정을 빠르게 하고 신사업 진출에 속도감을 부여하는 방향을 추진하고 있어 올 한해 금융사들의 움직임을 주목해야 한다는 관측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