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칼럼

[취재수첩] '인력 가뭄'에 말라가는 韓 소부장

김도현
- 대기업·외국계 회사 등으로 이탈 속출

[디지털데일리 김도현 기자] “인사담당자가 전국 대학과 대학원을 들쑤시며 다니고 있다.” (반도체 설계업체 A) “국내 대기업과 한국에 진출한 외국계 회사에 인력을 빼앗기고 있다.” (배터리 장비업체 B) “삼성이나 LG도 사람 뽑기 어렵다던데 우리는 오죽하겠나.” (디스플레이 소재업체 C)

최근 만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체 관계자들은 이같이 토로했다. 현재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배터리 업계의 가장 큰 화두는 ‘인력난’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반도체 제조사와 소부장 기업이 1년에 부족한 인원은 약 3000명이다. 디스플레이와 배터리에 관련 산업까지 포함하면 매년 1만명 이상이 모자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 인재로 한정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 SK LG 등 대기업은 주요 대학에 계약학과를 설치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으나 인력난을 해소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관련 학과가 설립되더라도 학생들을 가르칠 교수 구하기도 녹록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가 추진 중인 대학 정원 확대만으로는 현상황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업계 내 인재 확보전이 극심해졌다. 한 소부장 업체 대표는 “대기업에서도 사람이 시급하다 보니 순혈주의를 버리고 경쟁사나 협력사에서 경력직원을 데려가는 움직임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미국과 유럽 등에 본사를 둔 기업이 한국지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국내 회사 인원을 스카웃하는 사례도 급증했다는 후문이다.

인력 전쟁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건 국내 소부장이다. 규모가 더 큰 곳에 엔지니어 등을 빼앗기는 데다 동종업계 간 이직도 잦아지는 흐름이다. 과거 유사 업체끼리 사람을 빼가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었으나 일손이 급한 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영입하는 추세다. 이러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수주를 받아도 소화하기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렀다.

신입사원 채용 역시 난항이다. 처우만큼이나 사업장 위치가 중요해진 상태다. 일부 업계 관계자 사이에서는 ‘판하무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경기 판교 아래로는 사람이 안 간다는 뜻으로 지방 근무에 대한 반감이 큰 MZ세대를 지칭하는 말이다. 몇몇 소부장 기업은 판교 인근에 연구개발(R&D) 센터를 세우는 등 직원 모시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주로 중소중견 기업 위주인 소부장 산업을 위한 별도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동안 인재 육성 정책이 대기업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소부장과 학교의 연계, 고객사와 협력사 간 교류 등을 강화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이를 통해 소부장 경쟁력을 높이고 비전을 제시해 젊은 세대를 유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재풀 확장을 위해 소부장 계약학과를 신설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대기업과 달리 단일 업체가 만들기 어려운 환경인 만큼 컨소시엄 형태로 복수 기업이 공동 운영하거나 정부 지원 규모를 향상하는 등 대안이 제시된다.

일본 수출규제가 준 교훈은 자국 생태계의 중요성이다. 국내 소부장이 약해지면 대기업 공급망이 무너진다. 해외의존도를 낮추고 자립하기 위해서는 소부장 역할이 절대적이다.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 인력 육성 방안이 절실한 시점이다.
김도현
dobest@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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