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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반대 속 표류하는 간첩죄 조항 합리화… 국가기밀 지킬 의지 없나

이종현 기자

[디지털데일리 이종현기자] 간첩(스파이)의 사전적 의미는 ‘한 국가나 단체의 비밀, 상황을 몰래 알아내 경쟁 또는 대립 관계에 있는 국가나 단체에 제공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타국의 정보를 훔치거나 교란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는다. 그 성격상 음지에서 활동하며 발각시 행위에 대한 처벌과 외교 갈등으로도 이어진다.

상당수 국가는 안보상 이유로 첩보요원을 운영 중이다. 미국은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국가안전보장국(NSA) 등 복수의 정보기관에서 첩보요원을 두고 있는데, 타국 입장에서는 이들이 ‘간첩’이다. 러시아, 영국, 일본, 중국, 독일 등도 방첩을 위한 정보기관을 운영 중이며 한국의 경우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국가는 간첩 행위를 규정하는 법안을 바탕으로 엄중하게 처벌한다.

가령 미국의 경우 1995년 해군정보국 직원인 로버트 김이 한국 대사관에 강릉지역 무장공비 침투사건 관련 군사기밀을 유출한 데 대해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징역 9년에 3년 보호감찰을 선고받고 수감생활을 했는데, 동맹국인 한국에게 정보를 제공했다고 하더라도 간첩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의지를 보여준 사례다.

◆현행법상 간첩은 오로지 북한 뿐… 중국‧러시아가 간첩 행위 해도 처벌 못해

한국도 간첩에 대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형법 제2장 외환의 죄 제98조(간첩)이 통상적으로 쓰이는 ‘간첩죄’다. 다만 다른 나라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의 간첩죄는 적국 대상으로만 한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적국은 북한뿐이다. 북한 외 국가가 한국에서 간첩 행위를 하더라도 그를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형법 개정에 대한 필요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작년 9월 국제인권단체 세이프가드 디펜더스가 중국공산당이 세계 각국에 비밀경찰서를 세웠다고 폭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세이프가드 디펜더스는 한국에도 비밀경찰서가 있다고 알렸다. 국정원 등 정보당국은 작년 연말 중국의 비밀경찰서로 지목된 중식당 ‘동방명주’를 중국 비밀경찰서로 잠정 결론내렸다.

문제는 이를 수사하거나 처벌할 법적 근거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실제 동방명주에게는 식품위생법 위반 및 옥외광고물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해 고발하는 데 그쳤다.

중국뿐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4월 미국 군사기밀이 디스코드를 통해 유포됐는데, 그 내용 중에는 한국 대통령실을 도‧감청한 정황이 포함됐다. 대통령실은 이를 외교적 문제로 삼지 않았으나 이 행위 역시 현행법에서는 간첩죄를 적용할 수는 없다.

법무법인 태하의 김호정 고문 변호사(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와 관련 “현행 형법은 전시형법의 성격을 갖는 1940년 일본 개정형법가안을 모델로 입법했기에 간처보지를 포함한 외환의 죄 관련 조항 모두 ‘적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022년12월31일 중국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비밀경찰서의 국내 거점으로 지목된 서울의 중식당 동방명주 2층 사무실. 시진핑 중국 주석 관련 책들이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2022년12월31일 중국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비밀경찰서의 국내 거점으로 지목된 서울의 중식당 동방명주 2층 사무실. 시진핑 중국 주석 관련 책들이 쌓여 있는 모습 ⓒ연합뉴스

◆여‧야 국회의원 모두 법 개정 필요성 인식… 법원만 반대?

법 개정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회도 관련 논의를 진행 중이다. 제21대 국회에서는 적국뿐만 아니라 외국 또는 외국인(단체)까지 범위를 넓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된 상태다. 이를 발의한 국회의원은 여‧야를 가리지 않는다.

국민의힘에서는 2개 법안이 발의됐다. 조수진, 권선동, 김도읍, 김상훈, 김선교, 김성원, 서일준, 유상범, 장동혁, 하영제, 임병헌, 강기윤, 강대식, 구자근, 김병욱, 김석기, 김승수, 김영선, 김희국, 류성걸 등 20명이 법안을 함께 발의했다.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3개 법안이 발의됐는데 김영주, 김경만, 김경협, 김교흥, 김민철, 김원이, 조승래, 주철현, 진성준, 최인호, 홍익표, 김영배, 신정훈, 유정주, 윤영찬, 이원욱, 임호선, 장철민, 전용기, 홍성국, 이상헌, 김두관, 김병기, 김정호, 박재호, 안규백, 이개호, 이병훈, 전재수, 전혜숙, 한병도, 한준호 의원 등 32명과 무소속 양정숙 의원이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총 53명의 국회의원이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했다. 여‧야 모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모습을 보이는 상황이다. 하지만 법안은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적극적인 반대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논의가 이어지지 않고 있다.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은 “우방국, 동맹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와 적국, 준적국 또는 이에 준하는 외국에 제공할 수 있는 정보의 종류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률적으로 높은 법정형으로 처벌하는 것이 타당한지에 대해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내비쳤다.

또 우방국 사이에서도 법정형을 달리 적용해야 하지 않느냐는 의견도 밝혔다. 행위를 기준으로 처벌하는 것이 아닌, 대상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자는 내용인데 법학계에서는 해당 발언에 대해 “경악했다”는 말이 나온다. “우호적인 나라에는 약한 형을, 비우호적인 나라에는 강한 형을 법제도로 적용하자는 게 말이 되나. 부장판사 출신의 발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피력했다.

김호정 변호사도 “급변하는 오늘날의 국제정세에 비추어 적국과 우방국을 구분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 또 외국을 다시 동맹국과 비우방국으로 구분해 법정형을 달리 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다. 외국을 동맹국과 비우방국으로 구분해 법정형을 달리하는 국가는 찾아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다수 법학자들도 김 변호사와 같은 의견을 밝혔는데, 법원행정처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제기되는 중이다.

6월19일 진행된 법자세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대화 중인 이노공 법무부 차관(왼쪽)과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오른쪽) ⓒ연합뉴스
6월19일 진행된 법자세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대화 중인 이노공 법무부 차관(왼쪽)과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오른쪽) ⓒ연합뉴스

◆간첩 행위 주 무대, 물리 공간에서 사이버로… 범람하는 ‘해커’ 견제 필요

사이버보안 업계에서는 “간첩이라고 하니까 굉장히 정치적인 내용의 법안처럼 보이지만, 국가를 배후로 둔 해커들이 간첩 행위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서둘러야 한다”고 밝혔다.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는 해커의 경우 신원을 특징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 이에 대한 수사 역시도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해야 한다. 그러나 간첩을 적국으로만 규정하고 있는 현행법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한 수사 자체를 할 수 없다. 정보통신망법이나 개인정보보호법 등을 적용해 수사야 가능하겠지만, 일반적인 침해에 대한 대응과 간첩에 대한 대응의 질은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외국인 단체에 대한 규정이 생길 경우 해커조직 역시 외국인 단체로 규정해 정보당국이나 수사기관의 업무도 한층 수월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최근 미국은 중국이 자국 정부기관 관계자 이메일을 해킹했다고, 또 중국도 미국이 우한시 지진모니터링센터의 네트워크 설비를 공격했다고 서로를 비판하는 중이다. 이는 간첩 행위의 주 무대가 물리적인 공간에서 사이버 공간으로 넘어왔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 중 하나다.

중국 해커가 국내 기업‧기관을 노리는 공격 빈도는 점차 늘어나는 중이다. 연초에는 샤오치잉이라는 해커조직이 학회 웹사이트 등 보안이 취약한 곳을 대상으로 공격 활동을 펼쳤다. 핵태비즘적인 공격 성향을 보였으나 4월부터는 절취 자료를 판매하려는 등 돈벌이에 나서는 중이다.

이와 함께 4월 중국 연계 해커조직은 정부 용역사업을 수행 중인 민간 기업을 해킹, 내부망에 침투하려는 시도도 발각됐다. 6월에는 중국 업체가 제조해 국내 기관에 판매된 계측장비에서 악성코드가 발견된 사례도 발견됐다. 관계기관 합동으로 유사 장비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뤄지는 중이다.

러시아 역시 잠재적인 위협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서 해킹 역량을 총동원하는 ‘사이버전’을 진행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깜짝 방문하는 등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감이 높아짐에 따라 러시아 해커가 국내 기업이나 기관을 대상으로 공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2024년4월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될 예정이다. 만약 하반기 내에 논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형법 개정안은 폐기, 제22대 국회로 공이 넘어갈 확률이 높은 상황이다. 국민도, 여‧야 국회의원도 반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법원행정처의 반대에 부닥친 간첩죄 개정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관심이 쏠린다.

이종현 기자
bell@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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