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약없는 FEOC 세부안...中 배터리 배제, 결국 불가능? [소부장박대리]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 미국 정부의 IRA(인플레이션감축법) 관련 ‘해외우려단체(Foreign Entity of Concern, FEOC)’ 상세안 발표가 업계 예상보다 크게 늦어지면서 “FEOC를 통한 중국 배제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란 평가가 점차 힘을 얻고 있다.
미국은 지난 2022년 8월 전기차, 배터리 등 친환경 산업 중심의 자국 경제 부응 정책인 IRA를 발효하고 백서에서 중국, 러시아, 이란, 북한을 FEOC로 지정했다. FEOC는 미국에서 IRA 세액공제를 비롯한 혜택 대상에서 제외된다. 예컨대 한국과 중국 기업들이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에선 FEOC 상세안이 강력하게 조정될 경우 중국산은 미국 시장에서 아예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기대는 한국기업들이 반사이익을 취할 수 있는 기회로 풀이되어 왔다.
문제는 FEOC로 지정된 국가의 ‘어떤 기업을 어떤 조건으로 제재할 것’인가에 대한 상세안은 IRA 발효 1년이 지난 지금도 확정되지 않은 점이다. 업계에선 당초 지난 4월 IRA 상세안이 1차로 발표된 이후 6월 중순까지 의견수렴 기간을 거쳐 6월 말에는 FEOC 조항이 구체화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 여전히 어떤 ‘힌트’도 없이 감감무소식인 상황이다.
다만 복수의 업계 관계자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아무리 미국이라도 중국을 배제하긴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게 된 것”이란 평가에 힘을 싣고 있다. IRA 발표 초기에도 비슷한 분석이 있었으나 우려가 점차 확신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전기차, 배터리 산업에서 중국을 배제하기 어려운 이유는 특히 중국 기업들이 장악한 각종 핵심광물 공급망과 복잡하게 얽힌 기업 간 연결고리 때문이다. 전기차용 배터리 제조에서 가장 중요한 광물은 리튬, 니켈, 코발트, 흑연이 꼽히는데, 세계 시장에서 이들 광물의 가공 및 공급 규모 절반 이상을 모두 중국이 틀어쥐고 있다. 한국의 경우 중국에 대한 흑연 의존량이 90%에 달한다.
중국 외에서 공장을 짓더라도 차선으로 중국 업체와 합작법인을 설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국내에서 LG화학은 중국의 화유코발트와 손잡고 전북 새만금에 1조2000억원 규모의 합작공장 투자를 진행 중이며, SK온과 에코프로도 중국의 거린메이(GEM)와 새만금 전구체 생산 합작법인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 기업인 포드 또한 올해 인도네시아 니켈 처리시설 확보에 45억달러를 투자하면서 화유코발트와 손잡았다. 보통 수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투자의 경우 투자 손실을 최소화하고 생산의 조기 안정화가 중요하다. 이때 광물 가공과 공급 노하우에서 가장 앞서 있는 중국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중국은 우회로를 탐색하며 IRA의 향방을 예의주시 중이다. 우선 한국과 미국 등지에서 현지 기업들과 합작사를 설립하거나 기술을 제공하는 대가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최근 주요 배터리 기업들이 ‘탈중국’을 기치로 국내 기업 간 합작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공장의 예상 가동 시기, 충분한 물량과 수율 확보까진 수년 이상이 필요하다. 반면 전세계 시장이 요구하는 전기차와 배터리 물량은 매년 빠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배터리 업계에선 부담이 크다. 당장 확보한 수십조원 규모의 제품 수주 물량을 소화하려면 설비 및 생산능력 확충이 필수불가결한데, 이 과정에서 중국산을 완전히 배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중국의 값싼 소재를 완전히 배제할 경우 지금도 높은 원가부담이 더 가중될 수 있단 우려도 따른다.
중국계와 진행 중인 합작 계약이 이후 어떤 불이익으로 돌아올지도 미지수인 점도 부담을 가중하는 요인이다. 앞서 언급한 LG화학과 화유코발트의 합작사 설립 건에 대해 올해 LG화학은 “FEOC 향방에 따라 합작사의 화유코발트 지분을 모두 인수하는 것도 고려 중”이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현재로선 미국이 앞서 반도체 시장에 적용한 합작사 ‘지분율 25%’를 FEOC 인정 기준으로 삼을 것이란 예상이 제시된다. 현실적으로 이보다 강한 규제는 적용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태성 한국배터리산업협회 상근부회장은 “업계와 협회도 FEOC의 불확실성이 크고, 예단하기 어려운 상황이라 미국 정책 통상 당국과 협의할 때 굉장히 신중한 입장”이라면서도 “마냥 기다릴 순 없고, 공급망 구축에 있어 중국의 역할이 일정 부분 필요하다면 우선 협력의 틀을 만들고 이후 FEOC 가이드라인이 나오면 재조정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협회는 미국 정부에 FEOC 세부조항을 명확히 해달란 입장을 지속적으로 전하고 있다. 지난 6월16일 배터리협회가 재무부에 관련 입장문을 제출하고, 같은 시기 우리 정부도 핵심광물 조달 시 배제해야 하는 중국 기업을 명확히 정의해달라는 공식 의견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 핵심광물 수출국의 범위도 확장해 달라고 요청했다. FEOC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고, 국내 기업들이 안정적인 투자 전략을 조속히 확정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함이다.
한편 FEOC 상세안 발표가 늦어지는 가운데, 설상가상 최근 국내 배터리 제조사들과 협력하는 미국 자동차 제조사들이 배터리사가 IRA로 매분기 수취하던 수천억원 규모의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일부를 공유하자는 요청을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핵심 고객사들의 요청인 만큼 무작정 무시하기 어렵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북미에서도 중국과 경쟁하면서 이익의 일부는 자동차 업체와 나누는 상황이다. 이 경우 사실상 ‘중국이 배제된 북미=K-배터리의 낙원’이란 장밋빛 전망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이창실 LG에너지솔루션 CFO(최고재무책임자) 겸 CSO(최고전략책임자)는 올해 2분기 실적발표 설명회 중 “현재 미국 정부의 상황을 보면 IRA 지속 가능성에 상당한 의구심이 있다”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냈다. 이어 “제도 변경 리스크에 대비해 IRA에 의존하지 않고 본질적인 경쟁력을 확보, 자체 수익성을 중심으로 성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미국의 압박에도 중국 배터리 제조사들의 유럽 진출 및 세계시장 점유율 확대 속도는 점차 빨라지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중국 시장을 포함한 전세계 배터리 시장 점유율에서 CATL은 점유율 36.8%로 1위를 차지했다. 3위 LG에너지솔루션(14.5%)과의 격차는 2배 이상이다. 중국을 제외한 시장에서는 LG에너지솔루션(28.7%)에 이어 2위지만, 턱밑까지 추격한 점유율(27.2%)을 바탕으로 중국 배터리가 내수에만 의존한다는 시장의 인식을 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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