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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부진한 간첩죄 개정 논의… 여‧야 모두 필요하다는 법안인데 왜?

이종현 기자
6월19일 진행된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대화 중인 이노공 법무부 차관(왼쪽)과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오른쪽)
6월19일 진행된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대화 중인 이노공 법무부 차관(왼쪽)과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오른쪽)

[디지털데일리 이종현기자] 국회에는 숱한 법안들이 논의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2023년8월31일 기준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 중인 법안의 수는 1600건이다. 20대 국회가 시작한 2020년6월1일부터 여태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법안만 해도 3건이다. 10월 국정감사를 비롯해 내년 4월 제21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법안을 논의하는 시간은 넉넉지 않다.

계류 중인 법안 중에는 간첩죄를 규정하는 형법 개정안도 포함돼 있다. 현재 형법에서는 간첩죄를 적국에게만 적용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적국은 북한뿐이다. 북한 외 다른 국가에서 간첩 행위를 하더라도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상황인데, 중국이 국내에서 비밀 경찰서를 운영하며 간첩 행위를 했음에도 이를 식품위생법 위반, 옥외광고물법 위반 등 혐의를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의 정보당국이 대통령실을 도‧감청한 것으로 알려져 논란이 된 사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확한 원인 규명이 되진 않았으나, 만약 내부자가 미국에게 정보를 넘겼다고 하더라도 간첩죄는 적용되지 않는다. 중국, 러시아 또한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간첩 행위에 집중하는 것과 달리 대상(북한)을 규정하고 있다.

사이버보안 업계 관계자도 해당 법 개정과 관련해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의견을 피력했다. 간첩이라는 용어의 특성상 현실과 동떨어진 것처럼 여겨지지만, 국내 기업이나 기관을 노리는 해커의 활동도 간첩 활동의 일종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을 위협하는 대표적인 국가는 북한이다. 하지만 최근들어 중국 해커조직의 위협도 확대되는 추세다. 지난 7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은 기상청에 납품된 중국산 장비에 악성코드가 탑재돼 있었던 것을 발한 바 있다. 국정원은 해당 장비에 대한 운영을 중단시키고 국내 도입 유사 장비에 대한 전수조사를 시행하는 중이다.

해커조직이 산업기밀 또는 군사기밀을 유출 또는 이를 도울 경우 관련 특별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 하지만 각 특별법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상당수다. 정보통신망법과 같은 벌률이 적용된다. 처벌할 수 있는 수단이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그 무게감이 다르다.

간첩죄를 다루는 형법 개정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여‧야 모두 공감대를 보이고 있다. 유사한 내용을 담은 법 개정안이 여당인 국민의힘에서 2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는 3개 발의된 것이 그 예다.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국회의원은 ▲국민의힘 조수진, 권선동, 김도읍, 김상훈, 김선교, 김성원, 서일준, 유상범, 장동혁, 하영제, 임병헌, 강기윤, 강대식, 구자근, 김병욱, 김석기, 김승수, 김영선, 김희국, 류성걸 등 20명 ▲더불어민주당 김영주, 김경만, 김경협, 김교흥, 김민철, 김원이, 조승래, 주철현, 진성준, 최인호, 홍익표, 김영배, 신정훈, 유정주, 윤영찬, 이원욱, 임호선, 장철민, 전용기, 홍성국, 이상헌, 김두관, 김병기, 김정호, 박재호, 안규백, 이개호, 이병훈, 전재수, 전혜숙, 한병도, 한준호 의원 등 32명 ▲무소속 양정숙 의원 등 53명이다.

53명이나 되는 여‧야 국회의원이 필요성에 동의하는 법안이지만 좀처럼 논의에 속도가 붙지는 않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그 이유로 법원행정처의 반대를 꼽았다.

실제 지난 6월28일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제1소위원회에서 박영재 법원행정처 차장은 “외국에 관해서도 친소에 따라 달리 규정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것 아니냐”라고 발언한 바 있다.

해당 발언은 외교관계에 따라 친한 국가에게는 약한 법정형을, 그렇지 않은 국가에게는 강한 법정형을 부여하자는 것으로 인식돼 논란이 된 바 있다. 법조계에서는 이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법조문에 우방국은 5년, 비우방국은 10년 이렇게 하는 것은 외교적 자살”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지난 회의 당시 이노공 법무부 차관은 “간첩을 ‘적국’으로, 옛날의 교전 상태로만 한정하고 규정하는 것은 문제라는 지적이 있다. 간첩을 반드시 적국과의 교전 상태가 아닌, 일반적인 경우에도 국가안보에 공백을 주는 중대한 행위에 있어서는 처벌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형성이 필요할 것”이라며 개정안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행정처의 반대에 더해 야당에서도 군사기밀보호법, 산업기술보호법 등 기타 법안들과 법정형에 대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면서 6월28일에는 결정을 내리지 않고 계류하기로 결정했다.

6월28일 이후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는 7월13일, 8월31일 두 차례 더 회의가 열렸지만 두 회의에서 간첩죄를 다루는 형법 개정안은 논의 대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법안심사제1소위원회를 통과하더라도 법사위 전체회의, 그리고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첫 문턱조차 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53명이나 되는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임에도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데, 법안을 발의하며 관심을 보이는 국회의원 대부분이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 아니라는 점도 꼽힌다. 법안 발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국민의힘 20명 의원 중 4명은 법사위 소속이지만 더불어민주당 32명 의원 중에는 1명뿐이다.

법안 통과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 회의(6월28일) 이후로는 아직까지 변한 것은 크게 없다. 조율하는 과정인데, 어떻게 할지에 대한 해답은 없는 상태”라며 “해당 안건을 재상정해서 결론짓거나 심도 깊은 논의를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 벌써부터 법안 폐기 여부를 예측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종현 기자
bell@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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