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식 사전규제 저울질하는 한국, 국내외 전문가 모두 고개 젓는 까닭
[디지털데일리 이나연 기자] 유럽연합(EU) 디지털시장법(DMA)을 참고한 온라인 플랫폼 독과점 규제 법안이 국내에서도 다수 발의된 가운데, 정작 유럽 출신 해외 석학들은 DMA와 같은 사전규제가 비효율적이고 실효성이 낮다고 우려를 표했다. 경직된 사전규제는 급변하는 디지털 시장환경에 유연하게 대응하기 어려워 오히려 혁신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6일 오전 국회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한국인터넷기업협회가 주관하고 국민의힘 김희곤 의원실과 서강대학교 ICT법경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하는 ‘온라인플랫폼 규제 동향 국제세미나(Ⅱ)’가 개최됐다.
이날은 현지시간 기준 DMA에 적용되는 게이트키퍼(문지기) 플랫폼 최종 명단이 발표되는 날이다. DMA는 글로벌 빅테크의 시장 지배력 남용을 막기 위한 ‘사전규제’를 골자로 한 법이다.
자사 우대나 끼워팔기 등 행위를 사전적으로 금지하는데, 이를 위반하면 글로벌 연매출 10%, 최대 20% 과징금을 부과한다. 시가총액 750억 유로(한화 약 107조원), 연 매출 75억 유로(한화 약 10조7200억원), 월 사용자 4500만명 이상인 기업이 게이트키퍼 적용 대상이다.
EU 집행위원회는 지난 7월 미국 알파벳(구글 모회사)·아마존·애플·메타·마이크로소프트(MS)·바이트댄스·삼성전자 7개 회사가 EU ‘게이트키퍼 지정 기준’을 충족해 자진 신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게이트키퍼로 지정된 기업이 DMA를 어길 경우, EU가 천문학적 액수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는 만큼, 업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발표를 맡은 해외 석학들은 DMA가 표방하는 사전규제 방식이 가진 부작용을 조목조목 따졌다.
티볼트 슈레펠 암스테르담 자유대 교수는 “지난해 말부터 생성형 AI '챗GPT'에 대한 규제당국의 논의가 시작됐지만 이미 의결된 DMA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기지 못했다”며 “좋은 사전규제를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라고 꼬집었다.
특히 슈레펠 교수는 경직적인 성격인 사전규제가 문서화돼 유지되고, 추후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입증돼도 수정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혁신과 ‘미스매치(부조화)’가 일어난다고 강조했다.
디지털시장에서 경쟁력은 혁신에서부터 비롯되기에 기업 성장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큰 사전규제 대신, ▲네트워크 분석 ▲머신러닝 기반 스크랩핑 ▲행위자 기반 모형 등을 활용한 사후적 법집행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 슈레펠 교수 의견이다.
슈레펠 교수에 따르면 지난 2018년 EU가 제정해 전 세계 개인정보보호법 모델이 된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은 시행 이후 기존 앱 서비스의 3분의1가량이 중단됐으며, 같은 분기 신규 앱 출시는 예상치 대비 2분의1 감소했다. 소규모 기업은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콜라이 바르첸테비치 서리대 교수는 DMA 도입 취지가 경제성에 집중돼 있어 프라이버시나 보안 관련 문제의식엔 다소 소홀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바르첸테비치 교수는 “DMA 제정의 일차적 목적은 어디까지나 경제성으로, 경합성과 공정성을 증진하는 것”이라며 “관련 전문가들은 DMA를 다루는 데 있어 프라이버시나 보안 관련 사안은 해결이 어렵지 않거나 이미 해결된 것으로 치부한다”고 지적했다.
바르첸테비치 교수가 예시로 든 것은 DMA가 게이터키퍼에게 요구하는 ‘상호운용성’이다. 상호운용성이란 서로 다른 시스템이 아무런 제약없이 서로 호환될 수 있는 성질을 뜻한다. 카카오톡에서 보낸 메시지를 네이버 라인에서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르첸테비치 교수는 거대 온라인 플랫폼 간 상호운용성이 의무화되면 이들이 가진 대량의 이용자 정보 보안이 취약해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상호운용성이 데이터 마이닝, 피싱 및 신원도용, 보안 결함 등 위험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역시 간과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면서 바르첸테비치 교수는 “DMA 입법화 과정을 보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관계자들 간 대화 의지가 없었다”며 “한국에선 활발한 논의를 통해 사전규제 장단점을 면밀히 따져봤으면 한다”고 부연했다.
국내 전문가들 역시 한국이 DMA를 곧바로 적용하기보단, 자율규제 활성화와 사후규제 고려 등 현 시장 상황에 발붙인 다각적인 논의에 적극 임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오규성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온라인 플랫폼 분야에 대한 경쟁법 집행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사전규제를 도입하기보단, 공정거래위원회에 기술 및 데이터 관련 인력과 자원을 대폭 확충하는 것이 적확하고 신속한 법 집행을 달성할 방안”이라고 공감했다.
현행 공정거래법이 미국이나 EU 경쟁법과 달리, 시장지배적 지위 남용뿐만 아니라 불공정거래행위도 포괄적으로 규율하는 데다, 대규모유통업법 등 다양한 특별법도 갖추고 있어 온라인 플랫폼에 대한 규제 공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평가다.
한편, 국내법 환경이 사전규제에 맞춰진 만큼 산학계가 제안하는 사후규제 접근 방식을 채택하려면 강력한 법 집행 체제가 갖춰져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최경진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사후 규제 체계로 가야 한다는 주장에 찬성하나, 그러기 위해선 전반적으로 법체계 전체에서 구조조정이 필수”라며 “이러한 측면에서 자율규제는 지속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하며, 사회와 경제 체제에 신뢰성을 부여해야 한다. 해당 체제가 잘 정립된다면 현재 논의되는 DMA 형식 입법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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