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전

유럽 생활가전, 제품이 아닌 문화를 팔다

이수환


[디지털데일리 이수환기자] 오는 2015년 생활가전 1위를 외쳐온 삼성전자, LG전자가 유럽 생활가전 시장을 공략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어디든 쉬운 시장은 없지만 유럽만큼 국내 생활가전 업계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지역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럽 생활가전 시장 공략의 가장 큰 걸림돌은 빌트인이다. 말 그대로 냉장고, 오븐, 식기세척기와 같은 주방가전에서 현지 업체가 강력한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로 제품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 국내 업체가 고전할까? 이에 대해 업계 관계자는 “절대로(어떤 품질 차이) 아니다. 현지 조사도 철저히 진행했고 유통 업체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선을 그었다.

지난 9월 5일(현지시각)부터 10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2014’를 통해서도 비슷한 반응이 나왔다.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밀레, 지멘스, 보쉬 등 유럽 업체 제품은 프리미엄일수록 재료비를 많이 들여 제품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며 “국내 업체도 같은 방식으로 제품을 못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정해진 가격 내에서 품질을 끌어올리려는 차이가 있기는 하다”고 설명했다.

전반적인 프리미엄화가 이뤄지면서 IFA2014에서 선보인 유럽 업체의 생활가전 품질은 국내 업체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사양이나 디자인에서는 더 나은 느낌을 받았다. 세탁기나 식기세척기에 장착된 액정표시장치(LCD)나 사용자 인터페이스(UI)를 봐도 특별히 모난 구석은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 소비자가 현지 업체를 찾는 이유는 복합적이다. 무엇보다 전통 이상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유럽은 생활가전 그 자체가 태동한 지역이다. 따라서 제품의 장단점과 특성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독일만 하더라도 가족이 전자매장에 나가 꼼꼼하게 제품을 고르는 모습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나이 지긋한 할머니도 자신이 구입할 냉장고에 대한 시장조사는 물론 매장에서 직원에게 열심히 설명을 듣기도 한다.

유럽 현지 업체 관계자는 “제품이 아닌 문화를 판매한다고 보면 된다. 어머니가 쓰던 식기세척기, 아버지가 이용하던 진공청소기를 보고 자란 세대가 성장한 후에 어떤 제품을 구입할 지는 당연하다”며 “제품이 가지고 있는 철학과 문화가 세대를 걸쳐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에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높다”고 전했다.

흔히 유럽 생활가전 시장을 보수적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좀처럼 신규 업체가 시장점유율을 높이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대로 말하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중장기적인 전략과 계획을 세우면 충분히 공략이 가능하다.

◆미국 세탁 문화 바꾼 삼성과 LG, 해답은 ‘콘텐츠’=이미 국내 업계는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바로 미국 시장에서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국내 가전업체들의 미국 세탁기 시장점유율은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다. 최대 시장인 미국에 진입은 했지만 월풀이 장악하고 있는 세탁기 시장은 말 그대로 철옹성으로 보였다.

당시 미국의 세탁문화는 어두운 지하실에 세탁기를 두고 세탁물을 한꺼번에 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또한 세탁 방식도 ‘톱 로드’라 부르는 욕조형 세탁조 가운데 커다란 봉이 자리 잡고 있는 형태였다. 드럼세탁기는 아파트나 일부 시장에서 사용하고 있었고 미국의 주거문화를 고려했을 때 시장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이런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미국 소비자는 월풀 제품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쉽게 말해 대안으로 구입할만한 제품이 없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지하실이나 다용도실이 아닌 집안에 두고 쓰는 드럼세탁기가 등장했으니 소비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여기에 인테리어까지 고려해 다양한 색상을 적용하고 진동과 소음을 최소화한 DD(다이렉트 드라이브)모터를 적용해 만족도를 끌어올렸다. 스팀을 통해 사용자 편의성까지 고려한 것도 주효했다.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2012년 기준 미국 세탁기 시장에서 LG전자가 20.7%로 1위, 삼성전자는 17.4%로 2위다. 월풀은 16%에 그쳤다.

유럽 시장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빌트인 특성상 가구나 집안 구조 등을 복합적으로 따져야 하므로 미국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유럽 소비자는 와인 한 병을 구입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타고 몇 시간을 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국내 업체에게 필요한 것도 이와 같은 소비자에게 매력적인 제품을 만들고 여기에 문화라는 중독성 높은 콘텐츠를 심어놓을 필요가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TV나 스마트폰과 달리 생활가전은 유럽 고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며 “기능이 더 많다고, 디자인이 더 좋다고, 가격이 저렴하다고 무조건 잘 팔리지 않기 때문에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수환 기자>shu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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