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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실패한 팹리스에게 안락사를 허하라

한주엽

[디지털데일리 한주엽기자] 1999년 설립된 엠텍비젼은 휴대폰용 메인 프로세서, 카메라신호처리프로세서가 주력이었던 기업이다. 2004년 국내 팹리스 업계 최초로 ‘매출 1000억원 돌파’라는 기염을 토했던 바로 그 회사다.

엠텍비젼 실적에 적신호가 켜진 시기는 2009년, 스마트폰 시장이 태동하던 때였다. 이 회사는 스마트폰 업계가 요구하는 복잡다단한 SoC 형태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발빠르게 내놓지 못했다.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수 년간 매출은 급감했고 적자는 쌓였다. 수백억원의 ‘외환파생상품(키코)’ 손실은 치명타였다. 엠텍비젼은 결국 지난 4월 코스닥 시장에서 상장 폐지됐다.

최근 개최된 시스템반도체 산학 협력포럼 발대식에서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KEIT)의 한 관계자는 “국내 중소 팹리스 업체는 대기업의 시장잠식으로 성장이 정체됐다”며 “엠텍비젼 등이 이 때문(대기업의 시장잠식)에 어려움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마치 대기업(삼성전자)이 (독자 AP를 출시해) 엠텍비젼을 죽였다는 뉘앙스였다. 국가의 산업기술 연구개발(R&D) 과제를 기획, 평가, 관리하는 전문기관의 상황 인식이 이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러니 2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시점에 그 기업과 자회사에 수십~수백억원대의 국책과제를 맡겼을 것이다. 적자에 허덕였던 회사는 자회사를 헐값에 팔아버렸다. “아직도 국가로부터 받을 돈이 남았다”며 정부출연금을 매각 대금에 얹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정부가 링거(정부출연금)를 나눠주면서 좀비 업체를 양산한다는 말이 그래서 나온다. 손종만 지니틱스 대표는 “(가망없는 기업은 대해서는) 안락사를 허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서규 픽셀플러스 대표도 “죽을 기업은 죽게 놔둬야 인수합병(M&A)도 활성화된다”고 말했다. 요즘은 소위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라는 자들도 정부돈 받아먹을 궁리만 하고 앉았다. 을지로 인근의 한 세미나장을 가봤더니 수십만원의 비싼 수업료를 내고 눈먼돈을 어떻게 타먹는지 배우려는 이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런 정신으로 벤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팹리스 반도체 산업은 몇 년째 제자리 걸음이다. 기업은 인력 모자라다고 아우성이다. 정부 지원금에 목숨거는 일부 기업의 안일함, 그 돈을 받아 대충대충 때우자는 도덕적 해이가 이런 문제를 낳았다고 생각한다. 그쪽 인력이 왜 모자랄까. 졸업해봤자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팹리스 업체에 매년 직접 나가는 정부 지원금(과제)을 아예 없애버리면 어떨까. 기술과 인적 경쟁력을 가진 업체로의 투자는 원래 민간 펀드가 하는 것 아닌가. 정부는 그 돈으로 인프라를 조성하자. 시제품 제작 비용을 줄일 수 있다면, 스마트폰 앱 만들 듯이 쉽게 반도체 설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면 진정한 벤처기업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진단이 정확해야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온다.

<한주엽 기자>powerusr@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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