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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수십억 부어도 폐업위기…스타트업 대우 못 받는 가상자산 거래소

박현영


[디지털데일리 박현영기자] “법으로 투자자를 보호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산업이 죽는다. 언론은 산 좋고 경치 좋고 물 좋은 걸 찾으라고 하는데 사실상 힘들다”.

지난 13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출석한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투자자 보호와 가상자산 산업 진흥, 두 마리 토끼를 잡긴 힘들다는 얘기다.

당시 민 의원은 “가상자산 사업은 기술과 아이디어가 생명인 벤처사업이다.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들도 기득권이 있는 전통 금융회사가 아니다”라며 “투자자 보호는 하되 가상자산 거래소 평가기준은 관대해질 필요가 있다. 이걸 정부가 놓쳐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가상자산 거래소에 한없이 엄격한 기준

민 의원의 말처럼 설립 2년 차의 신생기업임에도 스타트업, 벤처기업으로 간주되지 않는 회사들이 있다. 설립 시기부터 흑자를 내는 것은 물론, 준법감시인을 대기업 수준으로 채용할 것을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자산 거래소 얘기다.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상 영업신고를 두 달여 앞둔 지금, 가상자산 거래소 업계 분위기는 냉랭하다. 60여 개로 추산되던 거래소 수가 하루아침에 4개가 될 것이란 추측이 많다.

영업신고를 위해 거래소들이 갖춰야 하는 요건을 보면 이런 추측이 설득력 있다. 설립 2~3년 차의 스타트업들이 갖추기 힘든 요건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부 눈치를 보는 은행 입장에선 가상자산 거래소는 스타트업이 아닌 셈이다.

은행연합회가 은행에 배포한 가상자산 거래소 평가방안에서 평가기준의 엄격함이 드러난다. 특금법에 따라 원화입출금을 지원하는 거래소들은 은행으로부터 실명확인 입출금계좌를 받아야 하는데, 은행이 어떤 기준으로 발급하는지 그 방안이 최근 공개된 것이다. 은행연합회가 마련했지만 FIU(금융정보분석원), 즉 금융당국이 만든 규정을 참고해 만들었다는 게 연합회 측 입장이다. 사실상 이 방안에 맞춰 준비해야 실명계좌를 얻어 영업신고를 할 수 있다.

방안을 보면 특금법 상 요건만 있는 게 아니다. 당기순손실 등 실적으로 거래소의 재무건전성도 평가한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설립과 동시에 흑자를 내는 기업은 거의 없다. 거래소도 기업이고, 대부분 거래소들이 길어야 생긴 지 3년, 짧으면 2년 된 것을 고려하면 엄격한 기준임이 사실이다. 국내 3위권 거래소인 코인원만 해도 설립 이래 적자를 이어가다 작년에 흑자로 전환했다.

얼마전 금융당국으로부터 영업신고 컨설팅을 받은 거래소에 따르면 준법감시인의 인원 수도 평가 대상이다. 고객 자금을 다루는 곳인 만큼 이상거래 보고담당자, 준법감시인 등을 채용해야 함은 물론이지만 전통 금융회사 수준의 인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해당 거래소 관계자는 “준법감시인만 여섯 명 정도 채용했다. 인건비만 해도 수억원이 나간다”고 토로했다.

◆특금법 준수 위해 수십억 쓰고 폐업 위기…앞뒤 다른 금융위

이런 엄격한 기준들을 충족하기 위해 지금까지 거래소들이 부은 돈은 수십억원이다. 우선 특금법 상 기본 요건인 ISMS(정보보호관리체계) 인증을 획득하는 데 2~3억원, AML(자금세탁방지) 솔루션 업체로부터 시스템을 사들이는 데 2~3억원을 이미 썼다.

또 실명계좌를 발급받기 위해 준법감시인을 채용하는 데 수억원, AML 시스템을 고도화하는 데 수억원을 지출했다. 그럼에도 특금법 시행 전부터 계좌가 있었던 4대 거래소 외에 실명계좌를 발급받은 거래소는 전무하다.

결국 중소 거래소들은 스타트업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비용을 지출하고도 실명계좌를 얻지 못해 사업을 접어야 할 위기에 놓였다. 정부 눈치를 보느라 계좌를 내주지 않던 은행들은 오히려 본인들이 가상자산 커스터디 사업에 진출하며 코인으로 돈을 벌 준비를 하고 있다.

투자자 자금을 빼먹는 중소 ‘먹튀’ 거래소들까지 지켜주자는 게 아니다. 그런 거래소들은 ISMS부터 획득하지 못해 이미 시장에서 추방되어가고 있다. 특금법 준수를 위해 수십억을 쓰고도 영업을 접어야 하는, 스타트업으로 간주되지 못한 곳들이 억울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위는 지난 15일 “금융당국이 4대 거래소에만 계좌를 주려 한다”는 언론 보도를 정면 반박하며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금융위 수장은 “투자자는 보호하되 거래소 평가기준이 완화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 “산 좋고 물 좋은 걸 기대하지 말라”고 한다. 앞뒤가 다른 입장. 우리는 어디에 귀를 기울여야 할까.

박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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