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다이브] 'IRA'가 뭐길래…모든 배터리 美 통한다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최근 2차전지(배터리) 산업을 통틀어 가장 핫한 키워드는 바로 미국의 ‘IRA(Inflation Reduction Act, 인플레이션 감축법)였습니다. 마치 한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요즘 배터리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꼭 IRA와 그 법을 만든 미국이란 나라로 방향이 흐르는 걸 느낍니다.
그리고 IRA는 앞으로도 최소 수년은 더 배터리 시장과 뗄 수 없는 키워드가 될 것으로 보이는데요. 따라서 지금의 배터리 산업을 이해하려면 최소한 IRA가 무엇인지 정도는 꼭 알아 두면 좋습니다.
◆이름은 인플레이션 감축법, 세간의 시선은 전기차와 배터리로
IRA는 사실 인플레이션 감축법이란 이름에 담긴 뜻 자체보단, 미국 중심의 전기차 산업 육성과 친환경 전환 가속에 방점을 둔 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2022년 8월1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총 7730억달러(약 1022조원)의 정부 예산을 기후 변화 대응, 기업 과세 개편, 보건복지 분야 개편 등에 투입한다는 IRA 법안에 서명한 것이 그 시작입니다. 그중 4430억달러는 친환경 에너지 산업과 친환경 자동차에 대한 보조금 및 세액공제 지원에 사용될 예정인데요. 즉 600조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자금이 IRA 규정을 충족한 기업과 소비자에게 돌아가게 됐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죠.
◆세액공제 혜택 받고 싶다면 "미국으로 오라"
골자는 대당 최대 7500달러가 적용되는 전기차 세액공제와 첨단제조 세액공제(AMPC)입니다. 우선 7500달러 세액공제 혜택은 북미(미국·캐나라·멕시코)에서 최종 조립된 전기차(순수 전기 또는 플러그인 하이브리드카)에 탑재된 배터리의 ‘부품’과 ‘핵심광물’ 조건을 달성하면 적용됩니다.
부품은 2023년 기준 전체 배터리 부품 가치의 50% 이상이 북미에서 생산·조립된 경우 3750달러의 세액공제 대상입니다. 부품은 지난 3월31일 공개된 IRA 세부지침에 따라 ▲양·음극판 ▲배터리 셀·모듈 ▲분리막 ▲전해액 등으로 규정됐습니다. 이 비중은 2024년 60%, 2025년 70% 식으로 매년 증가해 2029년에는 100%를 충족해야 합니다.
배터리 핵심광물은 배터리 제조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광물 기반 소재들을 의미합니다. 핵심광물은 2023년 기준 미국, 혹은 미국과 FTA(자유무역협정)를 맺은 국가, FTA와 준하는 별도의 광물협정을 맺은 국가(현재는 일본)에서 추출 및 제련한 광물 소재의 비중이 사용된 전체 핵심광물의 40% 이상일 때 3750달러의 세액공제 대상이 됩니다.
단, 위 조건 외 국가에서 추출한 광물도 미국이나 미국 FTA 체결국에서 가공해 50% 이상의 부가가치를 창출한 경우 세액공제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예외조항이 있습니다.
핵심광물은 ▲양·음극 활물질 ▲알루미늄박 ▲동박 ▲바인더 ▲전해질염·전해질 첨가제 등으로 규정됐습니다. 부품과 마찬가지로 이 비중은 2024년 50%로 늘고 매년 10% 증가해 2027년 이후는 최소 80% 이상을 충족해야 합니다.
결국 이 3가지 조건(북미 조립 완성차, 배터리 부품 및 핵심광물 규정)을 충족해야 7500달러의 세액공제 대상 전기차가 된다는 의미인데요. 가뜩이나 내연기관차보다 비싼 데다가, 각국의 전기차 친환경 보조금이 줄고 있는 추세를 감안하면 7500달러의 세액공제는 소비자 입장에서 굉장히 매력적인 조건입니다.
당연히 세액공제 적용 모델로 소비가 집중될 것이고, 전기차 제조사는 IRA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배터리 제조사와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IRA가 강력한 이유는 소비자뿐 아니라 친환경 제품(배터리·태양광 모듈) 제조사도 ‘첨단제조 생산세액공제(AMPC)’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라 배터리는 미국에서 생산한 셀(Cell, 배터리 구성 최소단위) 1kWh당 35달러, 모듈(셀을 모은 배터리 중간 구성단위)은 kWh당 45달러의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얼핏 적어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일례로 국내 주요 배터리 제조사인 LG에너지솔루션은 AMPC 도입 초기인 2023년 1분기 기준으로 약 1003억원의 영업이익을 추가로 확보했습니다. 전체 영업이익 6332억원의 15.8%를 AMPC만으로 달성한 셈인데, 결코 작다고 볼 수 없죠.
게다가 미국 내 배터리 생산량은 계속 증가할 것이기에 이 회사는 올해에만 약 1조원의 AMPC 이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이는 배터리 제조사들도 미국 내 생산 확대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게 된 이유입니다.
◆IRA 혜택과 중국과의 협력은 ‘양자택일’
다만 IRA를 잘 뜯어보면 미국의 정치적 의도 또한 확연히 드러납니다. 우선 배터리 핵심광물에 ‘미국 혹은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에서 추출 및 가공’이란 조건을 넣은 건 라이벌인 중국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현재 리튬, 니켈, 코발트, 흑연 등 배터리 제조에 필요한 핵심광물 상당수는 전세계적으로도 많은 나라가 중국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을 만큼 중국의 영향력은 막강합니다. 예컨대 음극재 필수 재료인 흑연은 60~70%를 중국이 장악하고 있는 수준이죠.
문제는 중국이 이 같은 자원 영향력을 ‘무기화’할 경우 전기차 중심 친환경 전환에 나선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정책에 제동이 걸리고 관련 주도권 또한 중국에 뺏길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를 우려한 미국은 배터리 산업 성장 초입부터 주요 배터리 생태계 기업들의 중국 의존도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핵심광물의 출신지 조건을 적용한 겁니다.
또한 세액공제와 별개로 미국은 중국을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성장 속도가 빠른 전기차 시장이기에 배터리 업계에서 반드시 공략해야 할 나라이기도 합니다.
이어 중국 견제에 쐐기를 박는 조항은 바로 ‘우려 외국집단(Foreign entity of concern, FEOC)’입니다. 미국이 지정한 FEOC는 중국, 러시아, 북한, 이란인데요. IRA에 따르면 배터리 부품은 2024년부터, 핵심광물은 2025년부터 FEOC에서 조달한 것이 일부라도 배터리에 포함되면 세액공제에서 제외됩니다.
결국 적어도 내년까지는 중국으로부터 배터리 자원 독립을 이루라는 압박인 셈이죠. 혹은 미국의 IRA 혜택을 택할지 아니면 중국의 안정적인 공급망과 거대한 시장을 공략할지 양자택일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K-배터리에 무조건 이득? “글쎄”
IRA는 표면적으로 한국 배터리 생태계 기업들에 유리한 법안으로 통합니다. 우선 중국을 제외하면 현재 전세계 완성차 배터리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등 국내 제조사들의 점유율과 영향력이 가장 높습니다. 배터리 핵심 소재인 양극재 제조사들의 기술력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요. 경쟁자인 중국이 미국 시장에서 배제될 경우 그 과실은 상당 부분 우리 기업들의 몫이 됩니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과 장밋빛 전망이 계속 이어질지는 미지수입니다. 우선 중국을 완전히 배제한 소재 수급이 가능할지 의문입니다. 핵심광물 추출, 제련 인프라 확보는 단기에 이뤄지기 힘든데 FEOC 조항에 따르면 늦어도 2년 이내에 중국 독립이 요구됩니다. 다만 미국과 주요 국가들이 이 문제를 제때 해결하지 못한다면 결국 중국과 어느 정도는 타협의 길을 택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죠.
또 이미 중국 기업들은 미국 업체들과 100% 합작법인(JV)과 공장을 미국 내에 세우는 방안 등을 추진하며 ‘IRA 개구멍’ 찾기에 열심입니다. 이를 제재하지 못하면 중국 배제 효과는 그만큼 감소하게 됩니다.
게다가 미국 정계에선 IRA가 외국에 너무 많은 혜택을 준다며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IRA는 애초에 전세계 배터리 제조·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정작 세액공제 등의 혜택은 대부분 해외 배터리 생태계 기업이 차지하게 됐으니까요. 따라서 미국의 자국 중심주의 노선이 향후 어떤 길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IRA에 추가 변화가 찾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한편 미국에 질세라 유럽연합(EU)도 핵심원자재법(CRMA)란 이름으로 IRA와 유사한 유럽중심 공급망 재편 정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세부내용 확정까진 약 2~3년이 걸릴 전망인데요. IRA와 유사하게 유럽 내 생산기지 설립, 핵심광물 가공 조건 등을 포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점점 심화되는 열강들의 배터리 산업 패권 경쟁에서 우리 기업들이 얼마나 지혜롭게 대처해 낼 수 있을지, 또 정부가 이를 정책·외교 차원에서 얼마나 잘 뒷받침해 줄 수 있을지가 앞으로의 관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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