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네트워크 업계
[디지털데일리 이유지기자] 국내 네트워크 산업계가 부글부글 끓고 있다. 비정상의 정상화, 불합리한 규제나 관행 철폐, 중소기업과 ICT 산업 발전을 위한 정부의 외침이 유독 이 분야에서만 제외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공공부문에서 국산 장비의 차별적 관행을 없애고 공정경쟁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관련법·제도가 마련됐음에도 현실에서는 변화의 조짐이 보이지 않고 있다.
최근 발주된 여러 공공부문 사업에서는 전송, 스위치 분야를 막론하고 특정 외산 장비를 요구하거나 국산 장비를 참여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경기도지방경찰청이 지난달 공개한 광대역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사업 사전규격에는 전송장비와 스위치 기술 요구사양에서 각각 특정 외산장비만 제안 가능한 독소조항이 무더기로 발견돼 논란이 일었다.
10여개 통신사와 장비 공급업체, 정보통신산업협동조합·네트워크산업협회 등 관련단체들은 사전규격에서 나타난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다행히 경기지방경찰청은 제기된 대부분의 의견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구대·파출소에 설치될 전송장비의 동작온도(섭씨 –20도에서 50도) 지원 환경 등 아직까지 논란이 남아있는 사항이 있긴 하지만, 앞으로 정식 발주될 제안요청서(RFP)에 공정성에 위배되는 조건은 사라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런데 전라남도경찰청 광대역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사업에서도 경기도지방경찰청 사업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사전공개된 기술규격에 특정 외산장비가 연상되는 기능이 여럿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지방경찰청 백본 스위치와 경찰서 망에 설치되는 백본스위치, 종합정보망 집선스위치 등을 동일제품으로 명시한 점 등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이로 인해 국산 스위치 장비의 입찰 참여를 배제하고 있다며 관련업계가 반발하고 있다.
경기지방경찰청이 사전규격을 공개한 시점은 공교롭게도 공공 시장에서 국산 장비 사용률을 50%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내세운 미래창조과학부 ‘네트워크산업 상생발전 실천방안’이 발표된 당일(13일)이었다. 전남지방경찰청은 경기지방경찰청 사업이 공정성 논란에 휩싸인 와중인 21일에 논란거리가 될 수 있는 사전규격을 게시했다.
새마을금고중앙회도 현재 진행하고 있는 전산망 전용회선 사업에 통신사업자들이 라우터·스위치 장비 등을 외산장비만 제안할 수 있도록 제한해 도마위에 올랐다.
하지만 지난 3일, 이 사업의 제안조건은 수정되지 않은 채 제안서 접수가 진행됐다. 그리고 이 사업에 참여한 KT는 국산이나 외산장비에 제한이 전혀 없는 전송장비(MSPP)를 모두 동일한 외산장비로 제안했다. 스위치뿐만 아니라 전송장비 업계까지 또다시 원성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다.
이 사업에서 LG유플러스는 센터와 지점 모두 국산 장비로, SK브로드밴드는 센터는 외산, 지점은 국산 장비로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업계에서는 국산 전송장비에 대한 불이익 조건이 전혀 없는데 KT가 비싼 외산 장비를 전량 선정했다는 점을 들어 의아하다는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업은 평가에서 가격 비중이 20%로 동종업계가 최근 진행한 비슷한 사업보다 높고, 통신사 역시 회선 투자비 절감이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보통신산업협동조합도 즉각 입장을 내놨다. 주대철 조합 이사장은 지난 4일 오후 “전국 각 채널을 통해 정부 및 공공기관의 국내장비 사용을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 새마을금고중앙회가 진행하는 네트워크 고도화 사업에서 국산장비를 배제하고 외산장비를 선정하려 한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조합측은 “KT에서는 국내 MSPP 전송장비 제조사들에게 납품가격을 자사에 공급하던 가격보다 인하해 달라고 요청했고 제조사들은 KT의 요구대로 가격을 인하해 줬다. 이를 준수한다는 차원에서 ‘제품공급 확약서’까지 받아 놓고서 20~30% 이상 비싼 외산 장비를 제안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하고 반문했다.
이어 “정보화 사업 ‘스펙알박기’는 이미 오래된 관행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강조한 비정상의 정상화는 결코 먼 데 있지 않다. 합리적이지 못한 관행과 규제부터 제대로 뜯어 맞추는 것이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물론 수주에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는 장비를 제안하는 것은 사업자의 자유다. 다만 KT가 ‘네트워크산업 상생발전 실천방안’ 공동협약(MOU)에 참여한 당사자이고, 이 MOU가 체결된 지 채 한 달도 안됐다는 점에서 보면 정부 정책에 대한 업계의 신뢰감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ICT 산업 경쟁력을 높이고 국산 장비의 차별적 관행을 없애 공정경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ICT진흥특별법’ 제정·시행, ‘네트워크산업 상생발전 실천방안’ 마련으로 국내 업체들은 사업 여건이 점차 나아질 것이란 기대감이 어느 때보다 높았다.
하지만 국산장비는 제안이나 입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일련의 사업이 연달아 추진되면서 네트워크산업계의 박탈감이 심화되고 있다.
최근 진행된 이들 사업과 일련의 논란은 공공부문에서 시행된 법제도나 정부 정책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주는 사례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마치 정부의 의지와 정책 방향을 비웃는 것 같은 모양새가 되고 있다.
그렇다. 새롭게 마련된 법제도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일정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쉽지 않은 정책일수록 시행 초기부터 민첩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미래창조과학부가 공정경쟁 기반을 조성하는데 시급하다고 꼽히는 제도적 과제를 마련하는데 보다 민첩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 ‘ICT진흥특별법’ 후속조치로 시행하기로 한 ‘IT 네트워크 장비 구축 운영·지침’, 장비 구매현황 조사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당근과 채찍이 될만한 여러 견인책도 짜내야 한다.
“공공시장에서 국산장비 점유율을 50%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기 좋은 정책을 내놓는 것보다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을 위한 입찰 참여 기회만이라도 마련되기를 바라는 게 국산 네트워크 장비업체들의 입장이다. 공정경쟁 기회도 마련되지 않는데 정부 예산 287억을 들여 ICT 명품 장비를 개발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건전한 네트워크산업 분야의 생태계 조성은 불과하고 사업 참여 기회조차도 얻지 못하는 실정을 미래부는 하루 빨리 인지하고 그 시작점부터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한 국산장비 업체 임원으로부터 나온 토로다.
기대가 크기 때문인가. 업계의 한숨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 네트워크산업 상생협력 실천방안 등 정부의 관련정책들이 국산장비 업체의 희망정책으로 빠르게 자리잡을 수 있길 기대한다.
<이유지 기자>yjlee@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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