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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IT기업들만 바보된 기분… 서방 IT기업과 러의 간교한 ‘밀월’ [DD 인사이트]

박기록
영화 <쉰들러 리스트>中
영화 <쉰들러 리스트>中
[디지털데일리 박기록 논설실장] 지금은 고전이 된 영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1993년작)는 독일 나치에 전쟁 물자를 납품하는 군수 공장의 기업주 오스카 쉰들러(1907~1974)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그는 독일군에게 뇌물을 주고, 유태인들을 자신의 군수 공장에 필요 이상으로 고용한다. 그런식으로 폴란드의 유태인들이 한 명이라도 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막았다.

유태인 직원들과 헤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쉰들러는 ‘이 차를 팔았다면 아마 10명을 더 살렸을지도 몰라. 그리고 이 배지는 2명은 더 살렸을 거야. 왜 못했지?'라며 직원들 앞에서 오열한다. 그래도 그렇게 살려낸 목숨이 무려 1100명이다.

그런데 이 영화가 나온 후 전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회사가 또 있다. 바로 IBM(International Business Machine)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IBM이 나치에 키 펀칭 기계를 활용한 데이터 처리 기술을 제공함으로써 유태인들의 대학살(홀로코스트)을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 의혹 때문에 IBM은 홀로코스트 피해자들로부터 제소를 당하기도 했다.

쟁점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왓슨 사장을 비롯해 IBM의 최고경영진이 자신들의 기술이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관련 기술을 제공했다는 점이었다. 결국 명쾌하게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감출 수 없는 IBM의 흑역사로 기록되고 있다.

이런 IBM의 흑역사가 최근 재소환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 1일(현지시간) 익명의 소식통을 통해 IBM의 일부 직원들은 최근 내부커뮤니티를 통해 최고 경영진들에게 ‘러시아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해놓고 왜 철수하지 않고있느냐’는 항의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직원은 ‘IBM이 과거 나치에 부역한 사실을 참고하라’며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있는 최고 경영진에서 직격탄을 날렸다.

IBM 뿐만 아니다. 이 매체는 마이크로소프트(MS), SAP 등 서방의 거대한 기업용 소프트웨어(SW) 회사들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는 의혹과 함께 익명을 요구한 해당 기업 직원들의 인터뷰를 실었다.

이들 서방 IT기업들은 러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하지 않고 있는 명분으로 ‘학교, 병원 등 비제재 대상 영역에서 어린이와 노인 등 민간 부분에서의 피해가 우려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지만 우크라이나 당국의 정보로는 러시아의 은행, 에너지 등 주요 기업들이 서방 IT기업들과 소프트웨어 라이선스 계약을 맺었다는 소식도 나돈다.

설령 외견상 러시아 기업들과의 단절을 선언했을 지라도 러시아 철도회사의 경우처럼 향후 몇년간은 실질적인 피해가 없을 것이라는 서방 IT기업 전직 직원들의 폭로도 있었다.

◆일부 서방 IT기업들은 철저한 실리 챙기기… '비우호국' 지정된 한국, 기업들은 그대로 리스크 노출

정말 이런 의혹이 사실이라면, 결과적으로 서방 IT기업들에 이어 러시아 철수 선언을 따라한 삼성, LG 등 우리 IT기업들만 ‘바보’가 된 셈이다.

서방의 시각과 논리에 따라, 개전 초기부터 러-우크라이나 전쟁을 그냥 ‘선과 악’으로 규정해 버린 가벼운 여론도 문제지만, 어쨌든 우리 IT기업들이 러시아 시장 철수를 선언한 댓가는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러시아 당국은 지난 3월7일 한국도 ‘비우호국’으로 분류하고 이들 국가에 대해서는 ‘루불화’ 결제만 가능하도록 했다.

달러나 유로화가 아닌 루불화로의 무역대금 결제는 이미 그 자체로 러시아와 거래하는 모든 국내 무역 기업들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리스크다. 루블화가 언제 휴지 조각으로 변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몇몇 서방의 거대 IT기업들의 ‘러시아 철수 선언’이 정치적 수사에 그쳤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그 진실이 드러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국제 분쟁에서 ‘힘든 정치적 결정’들이 앞으로 우리 IT기업들에게 얼마든지 직면할 수 있다. 우리 정부 뿐만 아니라 IT기업들의 ‘정치적, 전략적 모호성’도 이제는 좀 더 세련되게 가다듬었으면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당장 눈앞에 ‘중국 – 대만’의 양안간 갈등이 또 다른 리스크다. 양안 사태가 지금보다 더 악화될 경우를 가정하면 더욱 그렇다.

한-미 동맹의 틀안에서 중국에 진출해있는 우리 IT기업들이 유사시 중국 시장에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하는지 지혜로운 해법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박기록
rock@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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