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소재

[소부장 TF] ⑫ "EU로 오세유"…반도체·배터리 향한 러브콜

이건한 기자

전세계적으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이차전지 등 제조분야의 산업적 가치가 중요해졌고, 그에 따라 소재·부품·장비(소부장)산업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미중 패권경쟁에 따른 아시아 지역의 변화와 유럽연합(EU)의 적극적인 공세로 인해 우리나라는 제품만 생산해내는 위탁국가로 전락할 우려가 크다. 해외 정세에도 흔들림 없는 K제조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물밑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소부장 강소기업 육성을 통한 경쟁력 제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소부장 미래포럼>은 <소부장 TF>를 통해 이같은 현실을 직시하고 총체적 시각을 통해 우리나라 소부장의 과거를 살피고 현재를 점검하며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숙제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디지털데일리 이건한 기자] 그동안 미국, 중국, 한국, 일본 등과 비교해 반도체 및 배터리 산업 투자에 소극적이었던 유럽이 달라지고 있다. ‘반도체지원법’, 핵심원자재법(CRMA)’, ‘EU 배터리법’ 등이 잇따라 통과되면서 유럽연합(EU)도 본격적인 존재감 각인에 나섰단 평가가 나온다.

EU는 지난해 11월 430억유로(약 61조원)가 투입되는 유럽반도체법(ECA) 시행에 합의했다. 이어 올해 4월 합의된 최종안에 따르면 EU는 2030년까지 EU의 전세계 반도체 생산시장 점유율을 현재 9%에서 20%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유럽의 반도체법 제정은 앞서 반도체 산업에 공격적인 투자를 이어온 미국과 아시아 국가들을 의식한 행보다. 반도체는 모든 첨단 전자제품에 탑재되는 필수부품으로, 반도체 주도권 상실은 곧 미래 기술경쟁에서 언제든 뒤처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과 연결된다. 이는 미국이 미중 갈등 간 중국을 압박할 핵심 무기로 반도체 수출 제한 카드를 사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유럽 반도체법은 크게 ▲반도체 유럽 이니셔티브 ▲반도체 공급 프레임워크 ▲회원국과 집행위 조정 메커니즘을 뼈대로 한다. 이니셔티브 차원에선 EU와 민간기업들이 공공기금을 만들고 이를 2027년까지 차세대 반도체 연구개발 보조금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또한 EU 역내에 최초로 세워지는 반도체 생산시설엔 회원국이 보조금을 지급할 수 있는 근거가 생겼으며, EU 집행위와 회원들은 역내 반도체 공급망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게 된다.

산업통상자원부는 EU 반도체법을 통해 EU의 반도체 제조 역량이 강화될 경우 시장 경쟁이 심화될 수 있다고 봤다. 관련해 독일의 종합반도체회사(IDM) 인피니언은 지난해 11월 유럽 반도체법 보조금이 포함된 50억유로(약 7조원) 규모의 사상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시설 투자를 독일 드레스덴에서 진행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특히 EU가 반도체법 논의 과정 중 최종안에서 지원 대상을 ‘첨단 반도체 공장’에서 ‘구형 공정’ 및 ‘연구개발’, ‘설계’ 부문 등 반도체 산업 전반으로 확대한 만큼, 향후 보다 다양한 산·학, 민간기업이 EU의 지원을 바탕으로 유럽 내 반도체 산업 기반을 공고히 해 갈 것으로 예상된다.

EU 역내 배터리 기가팩토리 건설 플랜 (2025년 462GWh 규모 목표). [자료=Transport & Environment]
EU 역내 배터리 기가팩토리 건설 플랜 (2025년 462GWh 규모 목표). [자료=Transport & Environment]

배터리 산업 경쟁력 확보 정책 측면에서 미국에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있다면, 유럽에는 핵심원자재법(CRMA)가 있다. EU는 2022년 CRMA 입법 추진을 공식화하고 올해 초 초안을 마련했다.

주요 내용은 ▲핵심 원자재는 EU 역내에서 10% 이상 채굴 및 40% 이상 가공 ▲15% 이상은 역내 재활용 ▲모든 가공 단계에서 특정국가에 대한 원재료 수입량이 EU 연간 소비량의 65% 미만일 것 등이다. 아직 구체화 단계는 아니지만 IRA와 마찬가지로 유럽 내에 소재 채굴 및 공급, 원재료 자립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한 법안임을 알 수 있다. 전기차용 배터리는 현재 핵심 소재(리튬, 니켈, 코발트, 망간 등)의 상당 부분이 중국에서 가공돼 전세계에 공급되고 있다.

CRMA는 유럽뿐 아니라 한국, 중국 기업들에게도 기회가 될 수 있다. 특히 폐배터리 재활용 의무 규정이 포함된 만큼, 2025년 이후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폐배터리 시장이 유럽을 중심 무대로 삼을 수 있단 예상이 따른다. 국내 대표 폐배터리 재활용 제조기술 보유기업인 성일하이텍은 이미 헝가리, 폴란드, 독일, 스페인 등 유럽 각지에 지사 및 생산공장 건설에 나서며 시장 선점에 나서고 있다.

최근 제정된 EU 배터리법도 유럽이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의 중심지로 거듭날 가능성을 기대하게 만든다. 지난 14일 유럽의회에서 통과된 EU 배터리법은 ▲재생원료 사용 제도 ▲탄소발자국 제도 ▲폐배터리 수거 강화 ▲핵심광물 수거 ▲공급망 실사 규정 적용 등 배터리 주요 소재 재사용을 촉진할 다양한 근거 조항이 포함돼 있다.

예컨대 2031년부터 의무화되는 재생원료 사용 제도에 따르면 리튬이온 2차전지 핵심 소재인 리튬은 배터리 내에서 최소 6% 이상을 재활용해야 하며, 2036년부턴 이 비중이 12%로 증가한다. 코발트는 16%에서 26%로, 니켈도 6%에서 15%로 높아진다.

이처럼 유럽의 반도체, 배터리 지원 정책은 긴 유예 기간을 두고 유럽에 대한 투자 매력도를 높이는 데 집중돼 있다. 유럽의 주요 비교 대상인 미국은 관련 법제화 기간이 상대적으로 짧고 노골적인 중국 견제, 미국 내 투자를 강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건한 기자
sugyo@d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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